"기다리지 말고 청년 향해 내려가라"

"기다리지 말고 청년 향해 내려가라"

[ 청년,괜찮습니까? ] 3.교회 내 소통 괜찮습니까?

김혁 목사
2023년 03월 28일(화) 14:28
'교회에서 청년이 떠나가고 있다'라는 경각심은 더 이상 새롭지 않다. 한국교회를 진단하는 통계들을 살펴보면 청년층이 사라지는 현상과 분석을 자주 접하게 된다. 하지만 속 시원한 해결책을 찾기는 어렵다. 여러 해법들을 내놓지만 그것도 기성세대의 관점이지 정작 청년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청년들이 없는 교회에서 강한 생명력을 찾기는 쉽지 않다. 이를 바라보는 교인들도 교회의 미래를 생각하며 불안해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청년들을 살릴 수 있을까? 고심할수록 현란한 검색자료의 답변이 아니라 성경으로 시선이 간다. 이 문제를 해결할 열쇠도 성경에 있지 않을까?

청년이 죽다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행20:9)"

바울의 사역 가운데 가슴 철렁한 위기의 사건이 일어난다. 집회 중에 청년이 죽은 것이다. 에베소 사역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분위기여서 더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청년의 이름은 유두고. 은혜로운 말씀으로 생명을 살려내는 현장에서 생명을 잃었다. 단순한 목숨이 아니라 다음세대, 곧 공동체의 미래를 잃어버렸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됐을까? 우리는 먼저 청년 유두고의 삶을 조금이나마 살펴보아야 한다.

유두고는 당시 해안지역인 드로아에서 힘겨운 경제생활을 하던 노예 청년으로 보인다. 그는 고된 노동 속에서도 말씀을 듣고자 하는 열망으로 쏟아지는 잠을 쫓아가며 바울의 강론을 듣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의 깊은 고단함이 젊은이의 의지를 꺾어버렸다. 당시 청년 유두고의 삶의 현주소는 시간을 초월해 우리 곁으로 다가 온다.

1992년생 유두고

MZ 세대는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에 걸쳐 출생한 지금의 이삼십대를 의미한다. 현재적으로 이미지화해 보면 '1992년생 유두고' 정도일 것이다. 세월이 흘렀어도 청년들의 삶은 변하지 않았다. 세상이 살기 좋아졌어도 청년들의 삶은 여전히 팍팍하다. 교회 안의 젊은이들도 다르지 않다. 크리스찬 청년들이 가장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설문 결과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의 중요한 고민은 먼저 직업, 주거와 같이 경제생활과 연결된 부분이다. 구원과 복음 등 신앙의 본질에 대한 것들은 순위가 한참 뒤에 있다. 이런 사회 구조 속에 살아가야 하는 젊은이들을 이해하는 것이 청년 유두고 살리기의 시작일 것이다.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가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은 이렇게 바꿔볼 수 있다. '기독교 청년들이 교회에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불만은 무엇일까?' 2021년 목회데이터연구소가 내놓은 자료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청년들은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에 대한 불만족 요인 1위로 '지도자들의 권위적인 태도(35%)'를 꼽았다. 두 번째 요인은 '시대를 좇아가지 못하는 고리타분함'으로 31% 였다. 전체 요인 중 약 70% 가까이를 차지하는 불만족의 이유가 쉽게 표현하면 '말이 안 통하는 것'이다. '소통'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교회 의사소통 구조가 여전히 권위적이며 수직적임을 보여주는 결과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요즘의 청년세대는 교회의 의사결정까지 참여하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게 막히니까 청년들은 답답해하고 결국 교회를 떠나는 현상이 급속히 번지고 있는 것이다. 무엇을 요구하기 위한 참여가 아니다. 청년 유두고가 원한 것은 그의 자리를 인정하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진정한 소통이었을 것이다.

소통: 살리기 위해 내려가다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행20:10)"

청년이 죽었다. 사람들은 난리가 났다. 그러자 바울은 내려간다. 살리기 위해. 멀리서 바라보지 않고 직접 죽어 있는 청년에게로 내려간다. 공동체의 미래를 살리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 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고단한 삶의 굳은살이 배어 있는 청년 유두고 위에 엎드린다. 그리고 잃었던 생명이 돌아온다. 바울은 여느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청년을 살려냈다. 내려가서 엎드리어 그 몸을 안아준 것이다. 필자는 유두고를 살리는 모습에서 소통의 본질을 보게 된다.

소통은 내려가는 것이다. 아랫 사람이 윗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은 소통이라기 보다는 보고다. 소통은 오히려 위에 있는 사람이 연소한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는 것이다. 권위주의적이 되면 보고를 기다린다. 이전 세대까지는 이런 수직적 구조가 일상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청년 세대와는 이렇게 소통할 수 없다. 교회가 청년들을 살리고 싶다면 그들에게로 내려가야 한다. 기다리지 말고 과감하면서도 창의적으로 다양한 채널들을 이용해 먼저 제안하고 무언가를 함께 만들어내기 위해 대화해야 한다.

청년위원회

노회 안에는 다양한 연합회와 위원회들이 있다. 하지만 없는 게 있다. 청년을 위한 조직은 없다. 청년연합회가 조직된 경우도 있지만 명목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필자가 섬기고 있는 노회 다음세대위원회에도 그 안에 정작 다음세대인 청년이 없다. 기다리지 말고 규칙과 법을 만들어서라도 청년과 소통할 수 있는 청년위원회가 구성된다면 노회 분위기는 훨씬 젊어질 것이다. 이는 교회도 마찬가지다. 주된 의사결정 과정 기구인 제직회서부터 청년들의 참여는 제한된다. 그들이 집사가 될 때 까지 기다리지 말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청년위원회를 만들어 보자. 그러면 청년들 스스로 긍지와 자발성을 갖고 교회 사역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청년부에서 청년교회로

청년들은 권한을 위임해 줄수록 역동적이 된다. 대부분의 교회는 청년들이 청년부를 구성한다. 교회 규모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담당교역자 한 사람이 돌보는 체제다. 교육부서 중 하나로 분류되고, 다른 부서와의 차이는 구성원의 나이가 많다는 것 정도다. 그렇다보니 성인들의 모임인데 여전히 수동적이고 어른스럽지 못한 경우가 많다. 필자도 이런 고민 속에 이전교회에서 청년부를 담당했었고, 청년부를 청년교회로 전환하는 결단을 했다. 당시 60여 명의 청년들이 모였는데 청년교회로 전환하고 2년 뒤 270명 규모로 성장하게 됐다. 이름만 바꾼 게 아니었다. 드려진 헌금도 청년교회에서 집행할 수 있도록 교회가 허락해 주었다. 사업의 권한을 완전히 위임해 준 것이다. 그랬더니 헌금이 무려 기존의 10배가 넘는 일까지 경험하게 됐다. 청년교회가 직접 선교사를 파송하고 교회가 어려울 땐 오히려 재정을 지원하는 상황까지 일어났다. 가장 큰 결실은 위축돼 있던 청년부가 생기를 얻게 됐다는 것이다. 물론 이 한 가지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청년 유두고들이 마음껏 교회를 누리고 참여하는 데 권한의 위임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여러 증언을 통해 입증됐다.

청년이 살다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행20:12)"

유두고의 이름의 뜻은 '행복'이다. 다시 살려낸 청년 유두고를 통해 공동체는 잃어버렸던 행복을 되찾게 된다. 청년이 살아나면 교회는 행복해진다. 주님의 몸된 공동체의 미래가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청년 유두고를 살리면 된다.

김혁 목사 / 서울서북노회 다음세대위원회 서기·변두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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