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귀 잡아 끄는 '가짜뉴스' 홍수.. 진영싸움 악순환에 염증 [연중기획 - 피로사회 리포트]

박성준 2020. 8. 22.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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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지나친 속보 경쟁
국민 10명 중 2명만 "뉴스 신뢰한다".. 40개국 중 2016년 이후 계속 꼴찌
진실 밝혀 올바른 방향성 제시보다 정쟁 부추겨 사회적 혼란 가중시켜
시대마다 고유한 질병이 있다면 ‘언론의 위기’는 당대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중증질환이다. 국민의 낮은 언론 신뢰도는 소셜미디어에서 가짜 뉴스가 범람하는 환경을 만들었다. 언론이 사회 공기(公器)로서 역할을 다 못하거나 오히려 분란의 빌미를 제공하면서 국민의 눈과 귀는 어지러워졌다. 대한민국 피로사회 근원에는 이처럼 건강하지 못한 언론 생태계가 자리 잡고 있다.

우리나라 언론이 처한 위기는 세계 최저 수준 신뢰도에서 잘 드러난다. 영국 옥스퍼드대 부설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는 매년 세계 각국 언론 신뢰도를 조사하는데, 우리나라는 바닥권이다. 국내에선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참여한 올해 1∼2월 조사에서도 우리나라는 ‘뉴스 전반에 대해 신뢰한다’고 응답한 사람이 전체의 21%로 조사 대상 40개국 중 가장 적었다. 이는 지난해에 비해 1%p 하락한 수치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2016년 이후 계속 꼴찌다.

국민이 언론을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저널리즘 자체의 품질 하락도 심각한 수준이지만 ‘언론이 전달하는 뉴스 관점’에 대중이 동의하지 못하는 것도 주요한 원인이라는 게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 분석이다. 정파적 뉴스 소비가 신뢰도 하락의 주요 원인일 수 있다는 추정이다.

이는 세계적 현상인데 우리나라는 더욱 심하다. 국민 2300여명을 대상으로 한 이번 온라인 설문조사에서 ‘나와 같은 관점의 뉴스’를 선호하는 국민 비중이 다른 국가들에 비해 상당히 높게 나타났다. ‘나와 같은 관점을 공유하는 언론사의 뉴스’와 ‘특별한 관점이 없는 언론사의 뉴스’, ‘나와 반대되는 관점의 언론사의 뉴스’ 중 어떤 유형의 뉴스를 선호하는지 물은 결과 우리나라는 응답자 44%가 ‘나와 같은 관점의 뉴스’를 선호한다고 답했다. 이는 40개국 평균 28%보다 16%p나 높은 수준이며 터키, 멕시코, 필리핀 다음 순위다.

‘나와 반대되는 관점의 뉴스’를 선호한다고 응답한 국민 비율은 4%에 불과했다. 프랑스 22%, 노르웨이 17%, 이탈리아 13%, 영국 11% 및 40개국 평균 12%와 대비된다.
대중의 뉴스 편식은 정치적 양극화를 자양분 삼고 있다. 정치적 양극화는 언론매체 편향보도 현상을 일으키고 이는 다시 양극화 심화의 악순환을 만든다. 뉴스 온라인 소비 공간에서 유튜브 등의 뉴스 추천 알고리즘이 만들어내는 ‘반향실(echo-chambers) 효과’는 이런 악순환을 강화하는 고리다.
그 결과는 정치적 지형에 상관없는 언론과 언론인에 대한 신뢰 하락이다. 이번 조사에선 ‘가짜 뉴스’, 즉 허위정보나 오·정보를 누가 만드는지 물어보았는데 세계 평균은 정치인(40%), 정치행동가(14%), 언론사·기자(13%), 일반대중(13%), 외국정부(10%) 순으로 가짜 뉴스가 우려되는 출처라고 답했다. 반면 우리나라에선 정치인(32%), 언론사·기자(23%), 일반대중(20%), 정치행동가(18%), 외국정부(4%) 순이다.
언론의 그릇된 취재관행과 질 낮은 속보 경쟁, 부실한 보도 역시 국민이 뉴스에 염증을 만들게 하는 큰 원인이다. 크게는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주요 사건 때마다 언론 보도는 사실 속에서 진실을 밝혀 여론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기보다는 정쟁을 부추기며 국론을 분열시키는 데 한몫했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 사망 당일인 지난 7월 9일 언론 보도도 그동안 우리 언론이 독자 신뢰를 어떻게 잃었는지 전형적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우선 속보 경쟁 틈바구니에서 ‘쏟아진’ 각종 오보는 독자 알권리 충족은커녕 “사회적 혼란만 가중했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오후 7시 안팎 10여개 매체에서 “성균관대 인근에서 박 시장 시신이 발견됐다”는 내용으로 속보를 냈고, 이어 오후 9시 30분쯤엔 한 의학전문 매체에서 ‘박 시장 시신 서울대 이송 중’이란 제하의 기사가 나왔다. 모두 실제 사실이 확인된 이튿날 0시 이전에 나온 사실무근의 오보다. 경찰이 한창 수색작업을 벌일 때 “발견됐다”고 쓴 셈이다.
언론의 그릇된 보도 행태는 이후에도 이어진다. 박 전 시장 성추행 피소 사실이 알려진 뒤엔 선정적 보도가 쏟아졌다. 한 온라인 매체는 ‘성추행 장소로 거론되는 장소’라며 사진을 올렸으나 과거 집무실 내 침실 광경을 잘못 올린 것이었다. 또 다른 매체는 시장 집무실 내 침실을 두고 ‘비서만 아는 비밀공간’이란 식으로 표현해 지탄받았다.
일부 매체는 정원석 미래통합당 의원이 주장한 ‘섹스 스캔들’이란 표현을 그대로 가져다 기사를 써 논란이 됐다. 사실관계 확인과 2차 가해 소지 여부를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셈이다. 피해자가 제출한 고소 내용에 성관계와 관련한 내용이 없는 데다 해당 표현이 자칫 성폭력 피해를 희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부적절하단 지적이 쏟아졌고, 이후 정 의원은 당 차원 징계를 받았다. 그런데도 이를 갖다 쓴 기사는 온라인상에 여전히 남아있다.
또 일부 매체는 박 전 시장의 성추행 피소 사실이 확인되었음에도 박 전 시장 품성과 업적, 시민활동가로서의 생애를 부각하는 등 은연중 두둔하는 듯한 기사와 기고 글을 지면에 실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추후 시정되긴 했으나 피해자가 엄연히 존재하는 사건에서 더불어민주당이 내놓은 ‘피해 호소인’이란 단어를 써서 기존 보도 관행을 벗어나는 모습도 보였다. 결과적으로 이런 기사들은 온라인상에서 진영 싸움을 부추기고,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키우는 땔감으로 쓰였다. 독자 입장에선 마치 ‘내 편 네 편’ 나누듯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는 언론의 태도에 신뢰를 잃고 피로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실망이 피로로, 피로가 다시 실망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김영주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연구센터장은 “정보나 뉴스가 너무 많으면 뉴스에 대한 피로도가 쌓이고 결과적으로 뉴스 회피 현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며 “수년 전 로이터 미디어 조사에선 뉴스를 회피하는 정도도 측정했는데 우리나라 국민이 굉장히 뉴스 회피 정도가 높았고. 특히 정치 기사에 대한 회피도가 높았다”고 지적했다. 김 센터장은 “(언론 자정 노력과 별도로 뉴스 소비자 역시) 편향적 뉴스로 인해 생기는 스트레스나 화, 분노는 풀기가 무척 어렵다. 뉴스 때문에 너무 많이 힘들고 스트레스받고 그럴 땐 한 발짝 뒤로 물러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박성준·박진영·이창수 기자 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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