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변화 無”… 모욕·명예훼손 30% 최다
“대응해도 달라지지 않아” 무기력감 호소
“노동청에 직접 신고·수평적 문화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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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 김유미(28·가명)씨는 “위에서 군기를 잡는다며 신입만 들어오면 이런 갑질을 하고 대물림된다”면서 “이런 일들을 시키는 사람들이 소위 ‘고인물’(오래 일한 사람)들이고 계속 봐야 할 사람들이라 문제를 제기할 수조차 없다”고 하소연했다.
어렵게 취업 관문을 뚫은 청년들은 직장상사의 갑질과 나아질 것 없는 현실에 무기력함을 호소한다. 미래를 걱정하며 슬럼프에 빠지는 심리적 불안상태를 일컫는 ‘직장인 사춘기’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정도다. 직장 내 괴롭힘이나 부당한 처우 등 문제는 많은데 자신의 힘으로는 바꿀 수가 없다는 생각에 답답하고 불만만 쌓인다. 결국 직장인들은 오늘도 가슴에 사표를 품고 출근하는 게 현실이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1년… 직장인 절반은 여전히 갑질 시달려
16일은 직장 내 갑질을 막기 위한 개정 근로기준법(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된 지 1년이 되는 날이다.
그러나 직장인 10명 중 7명은 법 시행 이후에도 직장 내 괴롭힘 관련 행태가 그대로라고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한국고용노사관계학회가 지난 2∼8일 만 15세 이상 주요 산업 근로자 1000명 대상으로 온라인 패널조사를 한 결과, 개정 근로기준법 시행 이후 직장 내 괴롭힘 행위의 변화 정도에 대해 ‘변화 없음’이라 답한 비율이 71.8%나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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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에서 겪는 괴롭힘 유형으로는 모욕·명예훼손이 29.6%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고, 부당지시(26.6%), 업무 외 강요(26.2%), 폭행·폭언(17.7%) 등이 뒤를 이었다. 직장 내 괴롭힘 가해자로는 ‘임원이 아닌 상급자’(44.5%)가 가장 많이 꼽혔으며, ‘임원 또는 경영진’(21.8%), ‘비슷한 직급 동료’(21.6%) 등 순으로 나타났다. 직장 내 괴롭힘을 당했다는 응답자 3명 중 1명은 ‘괴롭힘 수준이 심각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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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을 받고 일한다는 직장인 B씨는 “하루를 꼬박해도 끝내기 힘든 일을 오후나 퇴근 직전에 주고 오늘 안에 끝내라고 하는 등 추가 업무를 당연하다는 듯 시키면서 야근수당도 안 준다”며 “무엇보다 ‘이 회사 나가면 받아주는 데 없다. 그 학력으론 다른 데 취업도 못 한다. 고등학교 때 뭐했냐. 남들은 지방에 4년제라도 돈만 있으면 들어가는데 너는 그것도 못 갔냐’면서 저를 무시하는 말을 할 때 가장 견디기 힘들다”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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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직장 내 괴롭힘이 끊이지 않는데도 대부분의 직장인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조사 결과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하고도 ‘참거나 모르는 척했다’고 답한 비율이 62.9%(복수응답)로 가장 높았다. 직장인들이 문제를 인식하고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한 이유는 무력감 때문이다. 참거나 모르는 척했다고 답한 응답자 67.1%가 ‘대응을 해도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지 않아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했다. 인사 등에 불이익을 당할 것 같아 대응하지 않았다는 비율도 24.6%로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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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계 회사를 퇴사한 직장인 이모(30)씨는 “직장상사가 회의 때마다 개인에게 모욕감을 느낄 정도의 심한 욕을 해 대체 내가 왜 여기에서 이런 욕을 들어야 하나 싶고 회사 가는 일 자체가 스트레스가 될 정도였다”면서 “그런데도 문제를 제기하지 못한 건 이걸 고발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라 고발한 사람만 잘리고 말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씨처럼 직장 내 괴롭힘으로 퇴사를 선택하는 경우에도 직장인들은 자신의 퇴사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취업포털 잡코리아와 알바몬이 지난 4월 퇴사 경험이 있는 직장인 2288명을 조사한 결과 응답자 절반 이상(52.1%)이 “정확한 퇴사사유를 밝히지 않았다”고 답했다. 이들이 진짜 퇴사사유를 밝히지 않았던 이유로는 ‘알린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이 없을 것 같아서(41.2%)’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굳이 알리고 싶지 않아서(26.1%)’, ‘업계가 좁으니까, 나중에 어떻게 다시 만날지 몰라서(14.8%)’가 뒤를 이었다. ‘진짜 퇴사사유를 알렸다가 불이익을 당할까봐’라는 응답도 10%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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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계속되는 직장 내 괴롭힘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문제를 제기해도 바뀌지 않는 상황을 타개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의 실효성을 높이고, 나아가 수평적인 직장문화를 조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직장갑질119 권두섭 대표는 “사용자에게 갑질 신고를 하도록 한 조항을 바꿔 노동청에 직접 신고할 수 있도록 명시하고 예방교육을 의무화해야 한다”면서 “4인 이하 사업장이나 특수고용노동자들도 법의 보호를 받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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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영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도 “상명하복과 집단주의적 직장 문화가 직장갑질 감수성을 떨어뜨리는 원인 중 하나”라면서 “결국 돈만 주면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노동자에 대한 잘못된 편견이 바뀌고, 노동자의 권리가 강화되어야 감수성도 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유지혜 기자 keep@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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