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 책상 닦고 커피 타고… 괴롭힘 당해도 “그냥 참는다” 63% [연중기획 - 피로사회 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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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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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 1년 됐지만
72% “변화 無”… 모욕·명예훼손 30% 최다
“대응해도 달라지지 않아” 무기력감 호소
“노동청에 직접 신고·수평적 문화 필요”


“회사에 나와서 제일 먼저 배운 일이 상사 책상 닦기예요. 다들 9시까지 출근하는데 막내는 7시30분에 나와서 책상 닦고, 상사가 볼 신문 가져다 놓고, 상사 컵을 닦아 원하는 비율대로 커피를 타서 올려다 놓으라고 합니다.”

직장인 김유미(28·가명)씨는 “위에서 군기를 잡는다며 신입만 들어오면 이런 갑질을 하고 대물림된다”면서 “이런 일들을 시키는 사람들이 소위 ‘고인물’(오래 일한 사람)들이고 계속 봐야 할 사람들이라 문제를 제기할 수조차 없다”고 하소연했다.

어렵게 취업 관문을 뚫은 청년들은 직장상사의 갑질과 나아질 것 없는 현실에 무기력함을 호소한다. 미래를 걱정하며 슬럼프에 빠지는 심리적 불안상태를 일컫는 ‘직장인 사춘기’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정도다. 직장 내 괴롭힘이나 부당한 처우 등 문제는 많은데 자신의 힘으로는 바꿀 수가 없다는 생각에 답답하고 불만만 쌓인다. 결국 직장인들은 오늘도 가슴에 사표를 품고 출근하는 게 현실이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1년… 직장인 절반은 여전히 갑질 시달려

16일은 직장 내 갑질을 막기 위한 개정 근로기준법(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된 지 1년이 되는 날이다.

그러나 직장인 10명 중 7명은 법 시행 이후에도 직장 내 괴롭힘 관련 행태가 그대로라고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한국고용노사관계학회가 지난 2∼8일 만 15세 이상 주요 산업 근로자 1000명 대상으로 온라인 패널조사를 한 결과, 개정 근로기준법 시행 이후 직장 내 괴롭힘 행위의 변화 정도에 대해 ‘변화 없음’이라 답한 비율이 71.8%나 됐다.

실제 직장갑질119가 지난달 19일부터 25일까지 19∼55세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직장 내에서 괴롭힘을 겪었다고 응답한 비율이 45.4%(454명)에 달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 직전인 지난해 조사(44.5%)보다 0.9%포인트 높다.

직장에서 겪는 괴롭힘 유형으로는 모욕·명예훼손이 29.6%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고, 부당지시(26.6%), 업무 외 강요(26.2%), 폭행·폭언(17.7%) 등이 뒤를 이었다. 직장 내 괴롭힘 가해자로는 ‘임원이 아닌 상급자’(44.5%)가 가장 많이 꼽혔으며, ‘임원 또는 경영진’(21.8%), ‘비슷한 직급 동료’(21.6%) 등 순으로 나타났다. 직장 내 괴롭힘을 당했다는 응답자 3명 중 1명은 ‘괴롭힘 수준이 심각하다’고 했다.

한 기업의 임원 수행기사 A씨는 “입사 첫날부터 ‘야, 너’ 하면서 반말을 하고, 폭우가 쏟아지는데 우산도 없이 담배 심부름을 시키거나 욕을 하기도 했다”면서 “그렇게 오전 7시부터 늦은 밤, 새벽까지 일했는데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그만두라고 했다”고 토로했다.

최저임금을 받고 일한다는 직장인 B씨는 “하루를 꼬박해도 끝내기 힘든 일을 오후나 퇴근 직전에 주고 오늘 안에 끝내라고 하는 등 추가 업무를 당연하다는 듯 시키면서 야근수당도 안 준다”며 “무엇보다 ‘이 회사 나가면 받아주는 데 없다. 그 학력으론 다른 데 취업도 못 한다. 고등학교 때 뭐했냐. 남들은 지방에 4년제라도 돈만 있으면 들어가는데 너는 그것도 못 갔냐’면서 저를 무시하는 말을 할 때 가장 견디기 힘들다”고 호소했다.

◆“말한다고 뭐가 달라지나요”… 무기력 호소하는 직장인들

이처럼 직장 내 괴롭힘이 끊이지 않는데도 대부분의 직장인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조사 결과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하고도 ‘참거나 모르는 척했다’고 답한 비율이 62.9%(복수응답)로 가장 높았다. 직장인들이 문제를 인식하고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한 이유는 무력감 때문이다. 참거나 모르는 척했다고 답한 응답자 67.1%가 ‘대응을 해도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지 않아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했다. 인사 등에 불이익을 당할 것 같아 대응하지 않았다는 비율도 24.6%로 뒤를 이었다.

실제로 이번 조사에서 회사나 노동청에 직장갑질을 신고한 사람은 3%에 그쳤다. 그나마도 이들 중 절반 이상(50.9%)은 괴롭힘을 인정받지 못했다. 신고를 이유로 부당한 처우를 경험했다는 응답도 43.3%로 조사됐다.

외국계 회사를 퇴사한 직장인 이모(30)씨는 “직장상사가 회의 때마다 개인에게 모욕감을 느낄 정도의 심한 욕을 해 대체 내가 왜 여기에서 이런 욕을 들어야 하나 싶고 회사 가는 일 자체가 스트레스가 될 정도였다”면서 “그런데도 문제를 제기하지 못한 건 이걸 고발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라 고발한 사람만 잘리고 말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씨처럼 직장 내 괴롭힘으로 퇴사를 선택하는 경우에도 직장인들은 자신의 퇴사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취업포털 잡코리아와 알바몬이 지난 4월 퇴사 경험이 있는 직장인 2288명을 조사한 결과 응답자 절반 이상(52.1%)이 “정확한 퇴사사유를 밝히지 않았다”고 답했다. 이들이 진짜 퇴사사유를 밝히지 않았던 이유로는 ‘알린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이 없을 것 같아서(41.2%)’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굳이 알리고 싶지 않아서(26.1%)’, ‘업계가 좁으니까, 나중에 어떻게 다시 만날지 몰라서(14.8%)’가 뒤를 이었다. ‘진짜 퇴사사유를 알렸다가 불이익을 당할까봐’라는 응답도 10%를 차지했다.
◆‘문제 제기하면 바뀌는’ 회사 만들려면

전문가들은 계속되는 직장 내 괴롭힘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문제를 제기해도 바뀌지 않는 상황을 타개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의 실효성을 높이고, 나아가 수평적인 직장문화를 조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직장갑질119 권두섭 대표는 “사용자에게 갑질 신고를 하도록 한 조항을 바꿔 노동청에 직접 신고할 수 있도록 명시하고 예방교육을 의무화해야 한다”면서 “4인 이하 사업장이나 특수고용노동자들도 법의 보호를 받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병훈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은 피해자에게는 문제 삼을 근거를 마련해줬고, 사용자에게는 과거에 없던 문제의식을 갖게 했다”면서 “다만 갑질 문제는 권력관계에서 비롯되는 문제인 만큼 근본적인 해결책은 평등의식 개선”이라고 했다.

윤지영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도 “상명하복과 집단주의적 직장 문화가 직장갑질 감수성을 떨어뜨리는 원인 중 하나”라면서 “결국 돈만 주면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노동자에 대한 잘못된 편견이 바뀌고, 노동자의 권리가 강화되어야 감수성도 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유지혜 기자 keep@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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