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축으로 ‘내 집 마련’ 언감생심…커지는 주거격차에 속 탄다 [연중기획 - 피로사회 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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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기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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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스트레스’ 시달리는 중장년층 / 정부 “집값 잡겠다” 호언장담했지만 / 서울 아파트 값 1년 새 수억씩 올라 / “더 늦기 전에”… 기를 쓰고 매매 집착 / 국민 자산 중 주택 비중 70% 달해 / 2018년 주택가격 상·하위 20% 10배差 / 10년새 오피스텔·고시원 거주비율 ‘쑥’ / 공급 부족·단기대책에 ‘풍선효과’ 불러 / “주거 취약층 고착화 우려… 지원 강화를”

“결혼하고 열심히 청약을 넣었는데 당첨이 계속 안 됐다. 어느 순간 지치더라. 다 잊고 살다가, ‘이러다 정말 남들 다 가진 집 나만 못 갖고 은퇴하겠다’ 싶어서 덜컥 집을 샀다.”

서울의 12년차 직장인 A(42)씨. 그는 지난해 휩쓸리듯 유주택자 대열에 합류했다.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다는 주택청약은 포기한 지 오래여서 구축 아파트를 매입했다. 같은 서울이긴 하지만 중학생 아이의 학교와 가족의 생활터전이 완전히 바뀌었다. 은행 대출 가능 한도와 기존 집 전세자금, 여유자금 등으로 살 수 있는 아파트를 고르다 보니 선택지가 한정됐다.

무주택자 딱지를 뗐으니 만족도가 높아질 만하지만 늘어난 출근시간이나 새로 적응해야 하는 아이와 아내의 생활환경을 생각하면 100% 만족스러운 선택은 아니었다. 아파트 집값이 1년 새 2억원 이상 오른 게 위안일 뿐이다.

그는 한때 유주택자였다. 취업 직후 은행 대출과 부모님 도움을 조금 보태 서울 외곽의 소형 평수 아파트를 샀다. 그는 “그때는 그래도 9000만원에 방 2개짜리 아파트를 살 수 있었다”고 말했다. 지금 사는 아파트값은 당시 가격의 거의 10배다. 아파트값이 ‘언젠가 떨어지겠지’ 하는 생각에, 또 ‘집값을 잡는다’는 정부의 호언을 믿고 기다린 게 잘못이었다.

‘내 집 마련’이 한국 국민 전반의 삶의 목표가 된 지 오래다. 차곡차곡 저축하면 언젠가 집 한 채 마련할 수 있던 ‘사다리’가 부서진 뒤 주택 소유에 대한 집착은 점점 더 커지는 모양새다.

1일 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의 자산에서 토지 포함 주택자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70%에 달한다. 일본의 40%, 영국의 54% 등에 비해 매우 높은 수치다. 또 경제·인문사회연구회 협동연구총서 ‘한국사회 격차문제와 포용성장 전략’을 보면 2018년 기준 우리나라 가계 평균 자산의 86.9%가 부동산자산이고, 자산을 축적할수록 부동산 비중이 점차 높아지는 모습이 관찰됐다.
아시아 외환위기 이전인 1988~1997년 한국의 부동산자산 비중은 빠르게 증가했다. 2007년쯤에 정점을 기록했다. 이른바 ‘버블’시기다. 이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인 2008~2012년 잠시 주춤하던 부동산 가격은 최근 다시 급증세다. 다만, 한국의 전국 주택가격 상승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 국가와 비교하면 아직 낮은 편이다.

계층 간, 연령 간, 지역 간 등의 주거 양극화도 심화하는 중이다. 국토연구원의 ‘주거실태조사를 통해 본 최근 10년(2008~2018년) 주거양극화 추이’ 보고서에 따르면 2018년 전국 기준 주택가격 상·하위 20% 간의 평균 가격 격차는 약 10배에 달한다. 주택가격 하위 20%의 평균 주택가격은 약 6800만원, 상위 20%의 평균 주택가격은 약 6억7000만원이다. 지역별로는 수도권의 주택가격 상·하위 간 평균 주택가격 격차가 약 8억원으로 비수도권의 3억7000만원에 비해 매우 크게 나타나고 있다.

특히 2018년 주거면적 하위 20% 가구의 주택유형 분포를 보면, 2008년에 비해 오피스텔과 고시원 등 주택 이외의 거처에 거주하는 비율이 크게 나타났다. 주거면적 하위가구 중 오피스텔 거주가구 비율은 2008년 4.1%에서 2018년 8.5%로 2배 이상 증가했고, 고시원 등 주택 이외의 거처에 거주하는 비율 또한 0.7%에서 9.4%로 크게 늘었다. 또한 2018년 주거면적 하위 20% 가구의 25.5%는 20대 가구주로 나타났는데, 이는 2008년의 12.1%에 비해 크게 증가한 수치다.
연구팀은 “주거수준 하위가구에서 주택 이외의 거처 가구나 20대 가구주가 차지하는 비중이 증가하고 있는 점은 향후 주거 취약계층의 고착화를 가져올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지원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부동산으로의 자산 쏠림과 양극화 등의 비정상적인 상황은 정부 정책 탓이 크다는 게 국민 반응이다. 한국은 선진국처럼 여웃돈을 금융자산으로 이끌 유인책이 많지 않다. 이에 필연적으로 부동산시장으로 몰리는 유동성은 부동산가치 상승을 부추겼고, 정부는 당장의 집값을 억누르는 수요정책에 집중했다. 더 많은 국민이 집을 가질 수 있게 할 주택 공급은 뒷전이었다. 박근혜정부는 각종 규제를 완화해 주택을 경기부양의 불쏘시개로 사용했지만 대규모 택지·지구지정 등의 공급 대책은 외면했다. 역대 가장 강력한 주택시장 규제를 쏟아낸 문재인정부는 ‘공급부족’ 지적에 수도권 3기 신도시를 대대적으로 추진 중이지만 입주까지 시간이 걸린다.
업계 관계자는 “공급을 단기적으로 당장 늘릴 수 없어 정권은 수요를 억누르는 대책에 몰두한다. 하지만 이는 단기대책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풍선효과’를 부르고, 또 다른 규제를 예고한다”고 지적했다.

앞으로 한국의 유주택자 비율은 점점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공급이 늘거나 집값이 안정화되어서가 아니라 국민 모두가 규제의 틈을 비집고 집 사는 데 혈안이 됐기 때문이다. 지난해 전국의 자가점유율은 58.0%로 2006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84.1%는 주택보유가 꼭 필요하다고 답했다. 또 지난 1분기 전국의 주택거래량은 약 33만건으로 최근 10년 내 최대 수준이었다. 작년엔 15만건이었다. 거래량 증가의 대부분은 경기 및 인천의 비규제 지역에서 발생했다.
최근에는 상대적으로 젊은층이 주택시장의 큰손으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감정원 집계에 따르면 지난달 서울 아파트 매매 건수는 총 4328건으로, 이 가운데 30대가 29.0%인 1257건을 매입했다. 전 연령대를 통틀어 가장 많다. 청약 가점제 확대로 당첨권에서 멀어진 30대 청약 포기자들이 집값이 계속 오를 것이라는 생각에 기존 주택 매입을 서두르는 것이다.

규제의 약발은 한시적이다. 이날 한국감정원에 따르면 지난달 서울의 주택 매매가격은 전월보다 0.13% 상승했다. ‘역대 최강’이라던 지난해 12·16 부동산 대책 등으로 4월(-0.02%)과 5월(-0.09%) 두 달 연속 하락했다 3개월 만의 상승전환이다.

나기천 기자 n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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