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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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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걸어라, 오래 살려면

많이 걸을수록 보험료를 할인해주는 ‘건강보험상품’에는 이유가 있었네
등록 2022-12-09 06:54 수정 2022-12-15 09:02
인간은 두 다리로 걸으면서 척추가 꼿꼿한 동물로 지구에서 유일하다. 인간의 진화에 큰 역할을 한 걷기는 인간 수명과도 관련이 있다. 한겨레 자료

인간은 두 다리로 걸으면서 척추가 꼿꼿한 동물로 지구에서 유일하다. 인간의 진화에 큰 역할을 한 걷기는 인간 수명과도 관련이 있다. 한겨레 자료

요즘 예금 금리가 올랐다고 하여 은행 앱을 켜고 새로 나온 상품들을 둘러보다가 문득 눈에 들어온 상품이 있었습니다. 워킹 적금이라고 하루에 1만 보 이상을 걷고 이를 인증하면 금리를 더 쌓아주는 상품이었습니다. 6개월에서 1년 동안 매일 1만 보씩 걷는다는 건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기존 은행들의 추가 금리 혜택은 신규 고객, 대출 유무, 주거래통장 등록, 자동이체, 연결된 신용카드 발급 등 그 은행과 관련된 경제적 행위의 대가로만 주어졌음을 생각해본다면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걷기란 지극히 개인적이고 얼핏 은행과 무관한 행위처럼 보이니까요.

최근 들어 걷기를 단순히 건강을 위한 행위뿐 아니라 경제적 행위로 연관시키는 활동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워킹 적금 상품뿐 아니라 많이 걸을수록 현금처럼 쓸 수 있는 포인트를 쌓아주는 스마트폰 앱, 매월 목표 걸음 수를 달성하면 보험료를 할인해주는 건강보험상품, 걷기 인증을 하면 통신료를 할인해주는 통신사 요금제 등 걷기와 관련한 상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교통수단 발달로 가장 걸을 필요가 없어진 현대인에게 걷기의 중요성이 오히려 더욱 강조되는 셈입니다.

펭귄과 타조는 모두 이족보행을 하지만 인간의 척추·다리뼈 구조와 차이를 보인다. 타조의 척추는 지면에 평행하며, 펭귄의 척추는 지면에 수직이지만 대퇴골이 지면과 평행하다. 한겨레 자료

펭귄과 타조는 모두 이족보행을 하지만 인간의 척추·다리뼈 구조와 차이를 보인다. 타조의 척추는 지면에 평행하며, 펭귄의 척추는 지면에 수직이지만 대퇴골이 지면과 평행하다. 한겨레 자료

걷기, 인간의 근본

침팬지가 우리의 조상은 결코 아니지만 조상 가계도를 따라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침팬지와 인간의 공통 조상에서 갈라진 분기점을 만나게 됩니다. 즉 우리와 침팬지는 한 줄기에서 파생된 다른 가지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인류를 침팬지를 비롯한 다른 유인원과 가르는 가장 결정적인 분기점은 어디일까요? 인류학자들은 그 지점을 ‘직립보행’ 시작으로 생각합니다.

육상동물은 대개 다리를 이용해 이동하지만, 그중에서도 인간의 보행법은 다소 특이합니다. 인간은 이족보행과 직립보행을 동시에 구사합니다. 이족보행이란 사지 중 다리 둘만 이용해 걷는 방법입니다. 사실 자연계에서 이족보행을 하는 동물은 드물지 않습니다. 새가 대표적입니다. 애초에 새는 상지가 날개로 변화했기 때문에 걸어야 할 때는 이족보행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캥거루 역시 뒷다리로만 걸으며, 지금은 사라진 티라노사우루스 같은 수각류 공룡도 두 발로만 걸어다녔습니다. 캥거루나 티라노사우루스의 앞다리는 뒷다리보다 매우 짧고 약해서 보행에 적당치 못했기에 이들은 뒷다리 두 개만을 이동에 사용합니다. 하지만 대부분 새와 캥거루는 걷기보다는 콩콩콩 뛰어다니는 용도로 더 많이 이용한다는 것이 사람의 보행과는 다릅니다.

물론 타조나 에뮤 같은 날지 못하는 대형 조류와 수각류 공룡은 인간처럼 두 다리를 번갈아 엇갈려 걷기에 인간처럼 이족보행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의 이족보행이 인간과 다른 점은 바로 척추의 방향입니다. 걷는 조류들의 척추 방향은 대개 지면과 비교해 비스듬하거나 거의 평행한 선상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니 이족보행은 해도 직립보행은 아닙니다.

이와 달리 인간의 척추는 지면에 수직으로 놓여 꼿꼿이 세워져 있습니다. 자연 상태에서 이처럼 등을 꼿꼿이 편 상태로 두 발로 걷는 직립보행과 이족보행을 동시에 하는 존재는 흔치 않습니다. 인간 외의 거의 유일한 예외가 펭귄이라고 하지만, 펭귄의 경우 허벅지가 수직이 아닌 수평으로 뻗어 있어 인간과는 다리 구조가 다릅니다.

펭귄과 타조는 모두 이족보행을 하지만 인간의 척추·다리뼈 구조와 차이를 보인다. 타조의 척추는 지면에 평행하며, 펭귄의 척추는 지면에 수직이지만 대퇴골이 지면과 평행하다. 연합뉴스

펭귄과 타조는 모두 이족보행을 하지만 인간의 척추·다리뼈 구조와 차이를 보인다. 타조의 척추는 지면에 평행하며, 펭귄의 척추는 지면에 수직이지만 대퇴골이 지면과 평행하다. 연합뉴스

인간의 걷기 효율 침팬지의 3.5배

우리 조상은 왜 다른 동물처럼 네 발로 움직이지 않고 허리를 세운 채 이족보행을 하게 된 것일까요?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가능성 있는 한 가지는 더 멀리 걸어야 할 필요에 적응한 결과로 봅니다. 아주 오래 전, 인류의 조상은 지금도 다른 유인원들이 그러하듯이 주로 열대우림의 나무 위에서 살았습니다. 나무 위에 살면 걸을 필요가 별로 없습니다.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팔을 이용해 매달려 움직이는 것이 더 빠르니 말이죠. 그리고 가끔 땅에 내려와서 걸을 일이 생기면, 손등을 땅에 대어 균형을 맞추고 네 발로 이동합니다. 이런 방식을 ‘너클 보행’(Knuckle Walking)이라고 하는데, 지금도 침팬지를 비롯한 유인원은 이런 방식으로 주로 걸어다닙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기후변화로 인류의 조상이 살던 지역에서 열대우림이 사라지고 초원이 늘어나게 됩니다. 변화에 따라 이들 중 일부는 아직 열대우림이 남아 있는 곳으로 이동한 반면, 어떤 개체들은 초원에 남아 그곳에 적응해 살아가기로 했을 겁니다. 초원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이전보다 더 많이 걸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직립이족보행의 장점이 드러납니다.

미국 워싱턴대학의 허먼 폰처 교수는 침팬지와 인간의 보행 특성을 분석한 결과, 인간은 침팬지에 비해 걷는 데 에너지를 훨씬 적게 쓴다는 사실을 알아냅니다. 폰처 교수(<뉴사이언티스트>, 2007년 7월16일치)는 체중이 50㎏으로 동일한 사람과 침팬지를 러닝머신에 올려 똑같이 1㎞를 걷게 한 뒤, 각각 소모된 열량을 측정했습니다. 그랬더니 사람은 1㎞를 걷는 데 겨우 13㎉를 소비한 반면, 침팬지는 훨씬 더 많은 46㎉의 에너지를 소모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에너지 효율 측면에서 본다면 인간의 걷기 효율은 침팬지의 3.5배에 이릅니다. 에너지 효율이 높다는 것은 그만큼 적게 먹고도 더 많은 거리를 이동할 수 있다는 뜻이니 당연히 유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빨리 걷는 여성 87살 vs 느리게 걷는 여성 72살

이후 인류의 몸은 점차 직립보행에 적합한 형태(팔보다 긴 다리, 골반뼈 구조 변화, 햄스트링 발달 등)로 진화했고, 이 과정에서 일어난 변화가 ‘손을 사용해 도구를 만들 줄 알고 사회를 이루어 살아가는 종’으로서 인류를 확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그러니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두 발로 성큼성큼 걷는 것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자 동시에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행위이죠.

인간이라는 종에게 걷기의 중요성은 생각보다 큽니다. 2019년 영국국립보건연구원(NIHR)은 영국인 47만4919명의 걷기 습관을 연구한 결과, 걷는 속도가 수명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는 사실을 알아냅니다. 사람들의 평균적인 걷는 속도를 느린 걸음(시속 4.8㎞ 미만), 중간 걸음(시속 4.8~6.4㎞), 빠른 걸음(시속 6.4㎞ 이상)으로 구분하고, 각 걸음 속도에 따른 수명을 연구한 결과 빠르게 걷는 여성의 평균수명은 87살인 데 비해, 느리게 걷는 여성의 평균수명은 72살로 약 15년의 차이가 나타났습니다. 남성의 경우 그 차이가 더 커서 빠른 걸음 남성의 평균수명은 86살이었지만, 느린 걸음 남성의 평균수명은 겨우 65살로 무려 그 차이가 21년이나 벌어졌습니다. 이 정도 차이라면 지금까지 수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알려진 대사질환- 고도비만, 고혈압, 당뇨 등- 의 영향력을 훨씬 뛰어넘는 결정적 지표라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걷는 속도에 따라 텔로미어의 길이가 다르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텔로미어란 유전물질인 염색체의 끝부분에 있는 구조로, 염색체를 보호하는 일종의 보호캡 구실을 하는 부위입니다. 텔로미어는 세포가 분열할수록 점점 닳아서 짧아지는데, 텔로미어의 길이가 일정 기준 이하로 내려가면 이 세포는 살아남기에 지나치게 노화된 세포로 분류돼 더는 분열하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백혈구에 든 염색체 텔로미어의 길이를 조사한 결과, 걸음 속도가 빠른 사람일수록 느린 사람보다 텔로미어의 길이가 더 길게 유지되고 있었다고 합니다. 텔로미어가 길다는 것은 그만큼 세포분열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니 그 세포들로 구성된 몸 전체의 평균수명 역시 길어진다는 뜻입니다.

이렇듯 걷는 속도는 건강과 수명의 바로미터입니다. 걷는 속도만 봐도 그가 얼마나 오래 살 수 있을지 알 수 있다는 뜻이니 보험회사 관련자라면 당장에 사람들의 걷는 속도를 측정하고 싶어질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나타나는 변화 중 하나가 걸음이 느려지는 것입니다. 대개 사람의 보행 속도는 일정하지만, 60대를 기점으로 점점 느려집니다. 이는 어느 정도 노화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골밀도가 약해지니 등과 허리가 굽고 근육량이 적어지며 다리가 가늘어집니다. 거기에 퇴행성 관절염까지 더해지면 발걸음은 한없이 느려집니다. 젊을 적엔 가볍기만 했던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워져 자꾸만 주저앉고 싶어집니다.

발걸음이 무거워질수록 더욱 힘차게

문제는 노화로 이전만큼 걷는 게 수월치 않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로 인해 걷는 것을 피하면 걷기 능력이 점점 더 빠른 속도로 퇴화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은 체력과 수명이 사라지는 속도도 빨라집니다. 걷는 게 힘들어 걷는 걸 기피하면 영영 걸을 수 없는 날이 더 빨리 다가온다는 뜻이죠.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미 발걸음이 느려지고 무거워졌더라도 의식적으로 더 빨리, 더 힘차게 걷는 연습을 하면 체력과 수명이 줄어드는 속도를 확연히 늦출 수 있다는 것입니다. 느리게 많이 걷기보다 짧게 걷더라도 빠르게 걷는 것이 더 효과가 좋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루에 10분씩 3회 숨이 찰 정도로 빠르게 걸으면 수명 연장 효과가 있다고 하니 말이죠.

젊은 시절에는 하고픈 것도 많고 가고픈 곳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으니 빠르게 돌아다니는 것에 익숙합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할 일의 경중을 판단하는 게 익숙해져 그만큼 발걸음도 느긋해지기 마련입니다. 마음은 느긋해지더라도 발만큼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로 빠른 속도에 맞춰 움직이도록 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그 여유로운 마음을 더 오랫동안 즐길 수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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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희 과학커뮤니케이터

*이은희의 눍음의 과학: 나이 들어가는 당신은 노화하고 있나요, 노쇠하고 있나요. 과학커뮤니케이터 이은희의 나이 드는 것의 과학 이야기.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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