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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원으로 바꾸는게 낫다"…어린이집 원장님 '눈물의 전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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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맞벌이 직장인 정모(38ㆍ경기 수원시)씨는 얼마 전 3살 난 아들의 가정어린이집으로부터 “사정상 문을 닫게 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정씨는 “너무 황당했지만, 원장 선생님이 펑펑 울면서 ‘도저히 운영이 안 된다’고 하소연해 따질 수 없었다”고 말했다. 갑작스레 옮겨갈 어린이집을 찾지 못한 부부는 양가 부모의 도움을 받아 한 달여를 버티고 월 이용료가 100만원이 넘는 놀이학교로 옮겼다. 정씨는 “저출산이라 아이들이 줄어든다는데 정작 아이를 보낼 어린이집 자리 찾기는 어려운 아이러니한 상황”이라고 했다.

지난 7일 대구 한 법인어린이집의 문이 닫혀 있다. 송봉근 기자.

지난 7일 대구 한 법인어린이집의 문이 닫혀 있다. 송봉근 기자.

최근 어린이집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 지난 2012년 무상보육 도입 전후로 우후죽순 늘어나 2013년 4만3770개로 정점을 찍은 이후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특히 0~3세 영아를 주로 돌보는 가정어린이집이 직격탄을 맞았다. 2013년 2만3632개로 전체 어린이집의 절반 이상 차지하던 가정어린이집은 10년 새 1만개 가까이 문을 닫았다. 가정어린이집은 아파트 1층 세대를 매매하거나 임차한 데가 많은데 최근 5년간 부동산 가격 폭등을 견디지 못했다.

경기 용인시에서 15년간 가정어린이집을 운영하다 올 초 폐원한 A씨는 “4년 전부터 아이가 줄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고 했다. 한때 동네에 입소문이 나 대기자가 50명에 달하기도 했다. 그런데, 수년 전부터 정원(20명)을 채우지 못하는 해가 거듭됐다는 것이다. 그러던 와중 어린이집이 세 든 집이 팔렸다. A씨가 사려했지만, 급등한 가격에 맞출 수 없었다. 그는 “집이 팔리면서 쫓겨나게 됐지만, 어린이집은 임대차 3법 보호를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어린이집 원아 17명은 뿔뿔이 흩어졌다. A씨는 다른 어린이집의 보육교사로 일한다.

지난 7일 대구 한 법인어린이집의 문이 닫혀 있다. 송봉근 기자.

지난 7일 대구 한 법인어린이집의 문이 닫혀 있다. 송봉근 기자.

법인어린이집은 경영이 악화해도 맘대로 문을 닫지 못한다. 민법·아동복지법 등의 규제 때문이다. 지난 7일 오후 대구광역시의 B법인어린이집은 철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문 닫은 지 1년이 넘었다. 철문 곳곳에 녹이 슬고 상호의 페인트가 벗겨져 잘 보이지 않는다. 한때 정원이 꽉 찼으나 3~4년 전부터 원생이 줄더니 견딜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법인 정관을 바꿔 노인ㆍ청소년ㆍ다문화가족 등을 위한 복지시설로 바꾸려 했지만, 관할 지자체에서 불가 통보를 받았다. 3층 건물을 비워둔 채 재산세만 물고 있다. 법인어린이집은 문을 닫으면 재산이 국가에 귀속되게 규정돼 있어 이사장이나 원장은 빈손으로 나가야 한다. 대구에만 10개의 법인어린이집이 문을 닫은 채 건물을 비워두고 있다. B원장은 “정부가 나 몰라라 손을 놓고 있다. 우리는 어디에도 하소연할 데가 없다”고 말했다.

어린이집의 내리막길은 20년 전 예고됐다. 한국은 2002년 합계출산율 1.18명으로 초(超)저출산 국가가 됐다. 1990년대 후반 60만명대였던 출생아 수가 10년 만에 40만명대로 떨어졌다. 맞벌이 가정이 늘고 무상보육이 시행되면서 보육 수요가 일시적으로 늘어났지만, 출생아동이 급감하고 있어 정부가 나서 어린이집 수급 조절을 해야 했다. 10여년 전부터 어린이집 단체가 진입 장벽을 높이고 질 향상 정책으로 전환하자고 제안했지만, ‘소귀에 경 읽기’가 됐다. 정부는 저출산 적응 대책에 관심이 없었고 지금의 줄폐원 사태를 맞고 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규모가 큰 민간 어린이집은 요양원ㆍ주간보호센터 등 노인 돌봄시설로 바뀌고 있다. 어린이집·요양원 모두 현행법상 노유자(老幼者) 시설에 속해 용도 변경이 쉬워서다. 다만 법인어린이집은 정관을 개정해 지자체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이게 쉽지 않다.

경북 소도시에서 민간 어린이집을 운영하다 요양원으로 변경을 고민 중인 B원장은 “4~5년 전부터 정원을 채우지 못했고 마이너스로 운영하면서 오래 고민을 했다”고 했다. 정원은 200명인데 아이들은 60명 남짓이라고 한다. B씨는 “경기가 좋지 않아 건물을 팔기도, 임대를 주기도 어렵다 보니 요양원으로 바꿔 운영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는 등 준비 작업을 하고 있다.

한 어린이집 간판. 뉴스1

한 어린이집 간판. 뉴스1

민간·법인 어린이집은 주는데 국공립 시설은 증가한다. 500세대 이상은 무조건 국공립어린이집을 짓게 돼 있다. 국공립시설 선호도가 높아 당분간 늘려야 하는 게 맞지만, 신생아 감소 추세를 감안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존 시설 활용에도 관심을 둬야 한다. 대구의 B원장은 “우리 시설을 활용하면 될 터인데 인근 아파트 단지에 또 짓는다. 우리는 다른 복지시설로 전환하지도 못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고 하소연했다.

석재은 한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노인 요양 수요가 커지는 만큼 어린이집 인프라를 이용해 요양원 등으로 전환하는 것도 좋은 대응 방안이라 생각한다”라며 “다만 영유아와 노인 돌봄은 완전히 다른 분야인 만큼 시설 전환 시 시설장에 대한 전문적인 교육을 지원하는 체계가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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