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바로가기

기사 상세

사회

`극단선택 위험군` 낙인 찍힐라…우울증 숨기는 벼랑끝 청소년

박홍주 기자
입력 : 
2022-09-14 17:46:43
수정 : 
2022-09-14 22:49:09

글자크기 설정

구멍난 정부 정신건강 관리

작년 중·고등학생 4명중 1명
"일상생활 못할 정도로 우울"

심리검사 결과서 관심군 뜨면
정상 나올때까지 재검사 권유

"보호자의 동의가 없더라도
전문가 상담·치료 받게해야"
◆ 위기의 생명 인프라 ② ◆

사진설명
14일 서울 망원동에 있는 청소년상담복지센터 앞을 한 청소년이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지나가고 있다. 최근 교육부 조사 결과, 청소년 4명 중 1명이 우울감을 느낀 적이 있다고 응답하면서 청소년 정신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 [박형기 기자]
#초등학교 4학년 아들을 둔 오 모씨(46)는 최근 아들에 대한 '학생정서·행동특성 검사(정행검사)'를 마치고 혀를 찼다. 학생 정서와 행동 특성을 통해 정신건강 상태를 판단하는 검사라고 해서 최대한 성심성의껏 응답했는데 담임 선생님이 "자녀가 '관심군'으로 나왔다"며 다시 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오씨는 "학교 측에서 '너무 객관적으로 보려고 하지 말고 문제가 되지 않도록 다시 쓰라'고 했다"면서 "형식적으로 검사하는 느낌이 들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고 말했다. 청소년의 정신건강 관리에 빨간불이 켜졌다. 극단적인 선택을 해 사망하는 청소년이 빠르게 늘고 있지만 이에 대한 정부의 대응이 형식적이어서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사진설명
14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20년 한 해 동안 만 9~24세 청소년 중 극단적 선택으로 사망한 이들이 957명에 달했다. 이는 2017년 722명보다 32.5% 늘어난 수치다. 한국자살예방협회 관계자는 "극단적 선택은 2011년부터 10년째 청소년 사망 원인 '부동의 1위'"라며 "40대 이상 연령대에서는 자살률이 감소하고 있는데, 10대와 20대에서는 큰 폭으로 오르고 있어 심각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지난해 중고생 중 26.8%가 최근 1년 사이에 2주 동안 일상생활을 중단할 정도로 우울감을 느낀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청소년 누구나 우울증 또는 극단적 선택의 위험에서 안전하지 않은 셈이다. 이처럼 청소년 우울증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지만 정부의 자살 예방 정책은 '탁상행정'에 그치고 있다. 정부는 청소년의 정서·행동 문제, 학교 생활 부적응 등을 예방·관리하기 위해 학생정서·행동특성 검사를 초등학교 1·4학년과 중·고등학교 1학년을 대상으로 시행하고 있다. 검사 결과에 따라 '정상군' '일반관리군' '우선관리군'으로 나눠 관리한다. 초등학생의 경우 학부모가 대신 응답하고, 중고생은 본인이 직접 응답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복지부에 따르면 지난해 우선관리군으로 분류된 학생은 1만9660명으로 전체 응답자 가운데 1% 수준이었다. 청소년 4명 가운데 1명은 우울감을 느끼고 있다고 응답하는 것과 큰 차이가 있다.

특히 초등학생의 경우 학생정서·행동특성 검사를 학부모가 대신 하도록 하면서 역선택 문제까지 불거지고 있다. 초등학교 1학년 딸을 둔 조 모씨(38)는 "잘못하면 담임 선생님이 선입견을 가질 수 있는데, 문제가 있다고 써 내는 학부모가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중고생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경기도 부천시에 사는 박 모군(17)은 "진짜 힘든 점이 있더라도 친구나 가족에게 말할지언정 해결도 안 될 학교에 말하는 것은 꺼려진다"며 "괜히 '불쌍한 아이' 취급을 받거나 귀찮게 불려 다닐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복지부 관계자는 "정행검사에 대해 학생 보호자에게 설명하면 '우리 애가 정신이 이상하다는 것이냐'며 거부감을 드러내는 일이 많다"고 어려움을 털어놨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청소년 우울증이 더욱 심각해질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한다. 청소년 우울증의 가장 큰 원인으로 '상대적 박탈감'이 꼽히기 때문이다. 경기 침체와 물가 불안이 단순히 어른들 문제에 그치지 않고 청소년 정신건강에도 악영향을 미치는 만큼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로 최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청년의 상대적 박탈감이 자살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상대적 박탈감이 클수록 자신의 미래 전망을 부정적으로 보고, 사회적 고립감을 강화해 극단적 선택 위험을 높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 결과 극단적 선택 위험성과 상관계수는 '사회적 고립감'이 0.309, '박탈감'이 0.291, '부정적 미래 전망'이 0.249 등으로 나타나 '직업 없음'(0.18), '가구소득 낮음'(0.172) 등보다 훨씬 높았다. 사회 구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해소하는 근본적인 변화 없이 형식적 검사와 교육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노출한 것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관계자는 "극단적 선택은 정신건강 서비스만 제공해서는 해결할 수 없는 다층적인 접근을 필요로 하는 문제"라고 강조했다. 단순히 성적 스트레스를 줄이는 것만으로 근본적 해결이 불가능한 만큼 청소년에 대한 '생명 인프라'를 촘촘히 구축해 나가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 관계자는 "상대적 박탈감을 덜 느끼도록 기회의 평등을 제고하고 미래에 대한 불안을 희망으로 변화시키는 사회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청소년의 정신건강 증진을 위해서는 청소년을 보호자와 분리해 하나의 인격체로 보고 정책을 설계해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정익중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보호자가 관심이 없거나 아이의 불이익을 우려해 문제가 있어도 상담·치료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부모의 보호가 아이의 정신건강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면 보호자 동의 없이도 상담과 치료를 받도록 절차를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낙인 효과에 대한 당사자 또는 보호자의 과도한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학생정서·행동특성 검사 관리 체계를 개편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정 교수는 "전문 상담 교사나 양호 교사, 사회복지사 등에게 관리를 맡기는 것도 대안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홍주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 기사가 마음에 들었다면, 좋아요를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