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바로가기

기사 상세

문화

[직장인 레시피] 정체된 조직에 필요한 것은 ‘자극제’이다

입력 : 
2022-03-10 22:49:12

글자크기 설정

조직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텃세가 존재한다. 이들은 새로운 리더, 특히 공채가 아닌 경력직에 발톱을 드러낸다. 그러면서 경력직이 능력을 펼치는 것을 은근히 방해한다. 이때 리더에게 필요한 것은 조직에 메기를 풀어놓는 것이다. 그래야 조직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사진설명
▶텃세에게는 경고를, 철새에게는 희망을

얼마 전 A사의 박 상무를 만났다. 그의 상무 승진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박 상무는 경력직으로 입사해 갖은 고생 끝에 임원 승진에 성공했다. 그와 덕담을 주고받으며 필자의 직업병이 발동해 그의 성공기에 대한 취재를 시작했다. 박 상무는 “그저 맡은 일 열심히 했고 운이 좋았다”라는 수능 수석 합격자의 “교과서 중심으로 공부했다”는 것과 같은 의례적인 말을 했다. 잠시 후, 술잔이 몇 순배 돌자 박 상무는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박 상무는 중소기업에서 근무하다 A사에 경력직 차장으로 입사했다. 그가 속한 부서는 회사에서도 알짜부서로 소문난 거래처 관리부서. 이 부서에는 박 차장과 같은 경력직 사원이 많았다. A사는 1조 원 이상 매출을 올리는 대기업. A사와 납품 및 하청 거래를 하는 중소기업은 많았다. 해서 A사의 사장은 거래 기업 중 유능한 인재라 판단되면 스카우트를 하곤 했다. 박 차장 역시 이런 케이스로 A사에 입사했다. 하지만 관리부서에는 A사의 이른바 성골, 진골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은 이사, 부장, 차장, 과장 직책으로 S급 거래처를 독점하고 있었다.

박 차장은 A사의 최 전무와 인연이 있었다. 공채 출신 임원들이 가득한 A사에서 최 전무 역시 경력직으로 입사해 전무까지 오르며 사장의 신임을 받고 있는 독특한 인물. 그는 하청과 납품 관계로 중소기업에 있던 박 차장을 접하고 이후 1년 동안 업무 능력과 평판 조회를 거쳐 박 차장을 A사로 스카우트한 장본인이다. 박 차장은 경력직 입사라는 불리한 조건과 선입견을 털어내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차츰 회사 일이 눈에 들어오고 손에 익자 박 차장은 부서는 물론 회사 전체의 분위기를 파악했다. 관리부의 오 부장은 공채 출신 에이스. 그는 대놓고 공채와 경력직을 차별하지는 않았지만 은근히 업무의 질과 양에서 차별에 두었다. 오 부장 직속인 두 명의 차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박 차장은 이런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업무에 매진해 입사 1년 만에 관리부서 내에서 최고의 실적을 올리며 회사 고위층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자 공채 출신들로부터 은근하면서도 집요한 견제가 시작되었다. 그 시작은 인사 이동이었다. 오 부장은 그동안 박 차장과 손발을 맞추면서 일을 한 팀원 5명 중 3명을 일시에 교체했다. 즉 에이스들을 빼 가고 경력 혹은 공채 출신 중에서도 업무 능력이 떨어지는 부원들을 박 차장 팀원으로 배치했다. 박 차장은 억울하고 분했지만 내색치 않았다. “그때는 속이 많이 상했어요. 하지만 내가 인사를 뒤집을 수는 없잖아요. 오히려 부장에게 인사에 대해 항의하면 내 팀으로 배치된 팀원들은 얼마나 속이 상하겠어요. 팀장이 자신들을 신임하지 못한다고 드러내는 것이니까”라고 그때를 회상했다.

박 차장은 새로운 팀을 원팀으로 만드는 리더십을 발휘하며 서서히 실적을 올리기 시작했다. 팀원들 역시 열등감을 털어내고 박 차장의 지휘 하에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당시 박 차장을 스카우트 한 최 상무는 박 차장의 업무 실적과 리더십을 주목했다. 즉 어떤 상황에서도 목표를 이루고 팀과 팀원을 강한 원팀으로 변화시키는 박 차장의 리더십이 남다르다고 판단한 것이다.

연말에 부장으로 승진한 박 차장은 관리부서 중에서 제일 큰 수도권 담당을 맡았다. 부장과 차장 그리고 관리부를 총괄하는 이사까지 박 차장의 승진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최 상무는 듣지 않았다. 그러자 회사에서는 ‘최 상무 본인이 경력직 출신이라 일부러 경력직을 승진시키고 우대해 파벌을 형성하고 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최 상무의 라이벌로 전무 승진 경쟁을 하고 있는 공채 출신 양 상무를 중심으로 공채 출신 사이에서 이 소문은 퍼져갔다.

박 부장은 그러나 이런 소문들은 신경 쓰지 않고 부서를 ‘자발적으로 일하는 부서’로 만들기에 노력을 다했다. 하지만 3명의 공채 출신 차장들은 똘똘 뭉쳐 박 부장의 리더십에 발목을 잡았다. 박 부장은 이런 상황에서는 업무 실적은 물론이고 부서가 하나가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최 상무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상무님, 부서원 구성 전권을 저에게 주십시오. 1년 안에 실적을 올리겠습니다. 만약 1년 동안 실적을 올리지 못하면 그때는 제가 책임지고 물러나겠습니다.”

최 상무는 허락했다. 박 부장은 바로 인사를 단행했다. 경력직 출신으로 자신의 팀에서 능력을 발휘했던 2명을 차장으로 임명하고 기존 두 명의 차장은 다른 부서로 전출시켰다. 그러자 ‘경력직의 반란’, ‘피의 공채 숙청’이란 등의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이런 소문과 견제는 최 상무가 막아주었다. 박 부장은 두 명의 경력직 차장을 통해 부서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실적에서 기존 공채 출신 차장들보다 두 배나 넘는 성과를 올렸다. 사장은 박 부장 부서의 실적에 만족해 특별 인센티브를 지급했다. 그러자 나머지 부원들도 박 부장을 신뢰하고 따르기 시작했다.

박 부장은 경력직과 공채를 구분하지 않았다. 능력과 업무 스타일을 고려해 부원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부원들이 일의 재미를 느끼게 하는데 주력했다. 또한 공채 출신과의 면담을 통해 그들이 느끼는 ‘역차별’의 불안을 덜어주는 데 노력했다. 세심하고 배려 깊고 한결같은 박 부장의 노력을 부원들이 인정한 것이다. 이후 박 부장은 회사의 에이스로 자리매김했다. 이제 최 상무는 물론이고 사장까지 박 부장의 능력과 리더십을 인정하게 되었다. 얼마 후 최 상무가 전무로 승진하고 곧바로 박 부장은 이사가 되었다.

“내가 두 명의 경력직 차장을 발령 낸 것에는 이유가 있어요. 물론 두 사람의 능력이 뛰어난 것도 사실이지만 이는 공채 출신에게 보내는 경고였어요. 그리고 그 두 사람을 통해 경력직 사원들에게는 희망과 기대를, 공채 출신에게는 위기감과 경쟁심을 주고 싶었어요. 공채 출신이라고 무조건 차장까지 승진하던 회사의 관례를 깨고 싶지는 않았어요. 내 자리를 건 승부였던 것이지요. 전무님이나 사장님께서 이런 제 마음을 알아주신 것 같아요. 물론 내가 경력직 출신이라고 무조건 그들을 우대하고 공채 출신에 대한 견제심만 있던 것은 아니에요. 경력직 이전에 이미 기업과 우리 회사에서 검증받은 인재들이에요. 그런데 쓸데없이 출신을 따지는 것은 애써 데려온 그들의 능력을 허비하는 것이지요. 나는 그들의 에너지를 한 곳에 응집시키는 작업을 한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공채 출신들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했지요. 그들과의 면담이나 회의, 회식 자리를 통해 내가 그들을 ‘제거의 대상’이 아닌 ‘같이 가야 할 동반자’로 여긴다는 진정성을 보여주었고 어느 순간 그 진심이 전달된 것이지요.”

박 상무는 리더가 갖추어야 할 리더십의 덕목을 그대로 발휘한 것이다. 경력 출신의 차장을 대거 기용함으로써 그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이를 통해 공채 출신에게는 경계경보를 내린 것이다. 물론 박 상무의 리더십이 여기에 그쳤다면 그것은 반쪽의 성공이었을 것이다. 박 상무는 공채 출신에 대한 따뜻한 배려와 포용으로 그들을 품에 안는데 성공했다. 이 결과 박 상무의 팀은 비로소 원팀이 된 것이다. 이처럼 직장에서는 누군가 메기의 역할을 해야 한다. 고요하고 무료할 정도로 행동력을 상실한 부서와 그 안에 안주하는 고인 물들에게 경고가 필요한 것이다. 박 상무는 즉 자극제의 필요성을 선택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경고와 경고를 통한 성공적 변화이지 조직 생태계 자체를 파괴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박 상무는 이 경계선을 잘 지킨 것이다.

그러면서 박 상무는 말을 이었다. “어쩌면 내가 부서에 경력직 차장 두 명을 임명한 것은 내 뜻이기보다는 전무님이나 사장님의 깊은 뜻이 숨어 있었다고 생각해요. 나는 그 차장 두 명을 조직에 활력을 심어주는 메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내가 바로 그 두 분이 회사에 풀어놓은 메기였던 것이지요.” 맞는 말이다. 전무나 사장이 그 정도의 안목과 역할에 대한 기대 없이 경력직을 입사시켜, 부장에 이사를 달아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어떤 조직이든 활력소는 필요하다. 그것이 따뜻함일 수도, 인센티브 혹은 단순한 회식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하고 우선시되는 것은 바로 올바른 인재를 등용하고 그에게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다.

사진설명
▶인재 등용으로 난제를 풀어낸 결단력 불리한 여건에서 리더가 되었지만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는 리더십과 그에 못지않는 배려와 인내로 조직을 성공적으로 이끈 리더가 있다. 바로 신라의 선덕여왕이다.

신라는 기원전 57년 박혁거세부터 935년 경순왕까지, 56명의 왕과 함께 992년을 존속한 한반도에서 가장 역사 깊은 왕조이다. 물론 그 시작은 씨족, 부족 형태였지만 이후 고구려, 백제와 함께 정립했고 660년 백제, 666년 고구려를 정복하면서 한반도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루었다. 원래 삼국 중 신라는 제일 약체였다. 위치도 한반도 남동쪽 끝에 있어 대중국 외교에서도 취약했고 그나마 가까운 일본 역시 백제와 밀접한 관계였다.

이런 지정학적 위치에서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공격을 막아내기에 급급했다. 서기 6세기경 법흥왕 때 신라는 나라의 제도를 갖추기 시작했고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을 거치면서 백제와 고구려를 상대할 실력을 갖추었다.

신라에는 전통적인 신분제도인 골품제도가 있다. 골품제도는 부계, 모계가 다 순수 왕족인 성골과 한쪽만 왕족인 진골 그리고 6개의 품계로 신분을 엄격하게 구분했다. 이 전통은 진흥, 진지, 진평왕 때까지 이어졌다. 진지왕은 형 동륜태자가 죽자 형제상속으로 왕이 되었다. 하지만 왕으로서의 능력이 모자라 쫓겨나고 동륜태자의 아들이 왕위를 이었다. 바로 진평왕이다. 남자 후계가 없었던 진평왕에게는 덕만, 천명, 선화 등 세 명의 공주만 있었다. 진평왕은 남동생이 두 명이나 있음에도 왕위를 덕만 공주에게 물려주었다.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 선덕이다. 『삼국사기』에는 덕만공주가 진평왕의 장녀, 『삼국유사』, 『화랑세기』에는 천명공주가 맏딸로 나온다. 천명공주가 맏딸이었는데 왕위를 이어받지 못했다면 이는 골품의 변화로 본다. 천명공주는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어머니이다. 천명공주는 진지왕의 아들로 성골에서 진골로 격하된 김용수와 결혼해 자동으로 진골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선덕여왕은 한반도 최초 여왕이라는 점,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점, 불교를 숭상하고, 당나라를 상대로 한 전략 외교를 통해 백제와 고구려를 견제하고 애민을 실천한 왕이다. 물론 당나라 조공 외교, 백제와 고구려에게 많은 성을 빼앗긴 점, 끊임없는 불사를 일으킨 점, 자신을 신화의 세계로 진입시킨 점 등에 대한 부정적 시선도 동시에 존재한다. 당시 기록에는 선덕에 대해 ‘너그럽고 어질며 민첩했다’, ‘관대하고 인자하며 사리에 밝았다’고 나와 있다. 선덕은 ‘성스러운 조상을 둔 여인’이라는 호를 받으며 632년 왕위에 올랐다. 선덕여왕의 나이에 대해서는 태어난 연도를 알 수 없어 왕위를 물려 받았을 때의 나이를 40~50대 초로 추정하고 있다. 즉위 초 선덕여왕은 정책의 최우선을 민심 안정에 두었다. 여왕은 백성 구제 제도를 마련하고 심지어 죄수들을 만나 따뜻한 마음을 전했다고 한다.

선덕여왕은 그러나 자신의 사람이 부족했다. 진골 출신 귀족들이 여왕을 얕보는 기색도 보였다. 아버지 진평왕의 동생 백반과 국반 등 두 삼촌도 호시탐탐 선덕을 쫓아낼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에 선덕은 서두르지 않고 서서히 왕권을 강화했다. 첫 번째가 친위세력 형성이고, 동시에 정통성 확보였다. 그러기 위해 선덕여왕은 두 명의 인재를 선택했다. 그리고 당나라에 관계 개선과 동맹, 문물 교류, 책봉을 요구했다.

선덕여왕이 발탁한 인재는 김춘추, 김유신이다. 김춘추는 진지왕 계열이며 어머니는 선덕여왕과 자매인 천명공주. 부모 양쪽이 왕족인 성골인 셈이다. 김유신은 가야 왕족 출신이지만 신라 귀족들 사이에서는 굴러온 돌 취급을 받고 있었다. 선덕여왕은 김춘추에게 정무 자문관, 외교 총괄을 맡겼다. 김유신에게는 군 지휘를 맡겼다. 그러자 거센 반발이 일어났다. 귀족들은 김춘추의 부각에 경계심을, 김유신이 군부 실력자로 등장하는 것에 반발했다. 이때 선덕여왕이 선택한 것은 바로 김춘추와 김유신의 혼인 동맹이다. 『삼국유사』 등에서는 김춘추와 김유신이 사돈이 된 것을 돌발적인 스캔들로 묘사했지만 이는 신라의 지배구조를 바꾸는 대사건이었다. 김춘추는 성골이었지만 폐위된 진지왕의 손자라는 약점이 있었고, 김유신은 가야 왕족 출신의 진골이었지만 가야는 이미 망한 국가였다. 두 사람 모두 야망을 펴기에는 약점이 있었다. 선덕여왕도 여왕이라는 점, 후계를 낳을 수 없다는 점에서 중앙 귀족의 진정한 충성심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선덕여왕은 김춘추, 김유신을 등용하고 본격적인 리더십을 발휘했다. 선덕여왕은 이 두 사람의 능력을 활용했다. 김춘추는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등 신라의 존재감과 부각시켰고 김유신은 전투를 이끌며 내부 반란에도 대비했다.

사진설명
▶리더 개인보다 앞서는 것은 조직의 이익 민심 안정과 왕권 강화를 위해 선덕여왕이 선택한 것은 불교였다. 분황사, 영묘사, 황룡사 9층탑을 만들었고 또 첨성대를 지어 농사에 활용했다. 자장법사를 당나라에 유학 보내고 국비 장학생을 선발해 당나라에 유학을 보냈다. 또한 불교와 왕실의 정통성을 동일시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즉 ‘왕이 곧 부처’라는 인식을 백성들에게 심어준 것. 선덕여왕은 21개의 사찰을 창건했다. 특히 전쟁 전사자의 혼령을 모신 영묘사를 매년 참배, ‘나라를 위해 전사한 일개 병사의 혼령도 위로하는 왕’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물론 큰 불사에 대한 비판도 있다. 하지만 국민 통합과 여론 형성에 불교는 유용한 통치의 수단이었다.

내정을 안정시킨 선덕여왕의 숙제는 군사 부분이었다. 그러나 국방력 강화는 단기간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선덕여왕은 당나라에 군사 지원과 함께 고구려, 백제에 대한 직접적인 압박을 요구했다. 하지만 당나라는 선덕여왕을 여자라고 업신여겼다. 심지어 당 태종은 “여왕이기에 이웃이 얕보는 것이다. 신라가 원한다면 내가 황실 종친을 신라왕으로 보낼 수 있다”라는 망발까지 할 정도였다.

선덕여왕은 온갖 수모와 조롱을 당하면서도 당나라와 교류를 멈추지 않았다. 당나라의 도움이 없다면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을 당해내지 못한다는 냉정한 현실 판단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선덕여왕은 자신의 자존심보다는 국가 존립, 국민 생존이 먼저라는 리더로서의 책임과 의무로 모욕을 이겨낸 것이다.

647년, 선덕여왕은 재위 16년을 맞았다. 정세는 김춘추의 외교 노력과 김유신의 군 지휘로 유지되고 있었지만 내정은 평탄치 않았다. 중앙 귀족, 관료, 군대, 백성 등 신라의 모든 구성원에게 여왕 통치는 첫 경험이었다. 귀족과 진골들은 후계 없는 선덕여왕의 ‘다음’에 관심을 집중했다. 당시 선덕여왕의 후계를 이을 수 있는 성골 남자는 없었다. 자매 천명공주는 진골이 되었고 선화공주는 백제 무왕과 ‘서동요 스캔들’에 휩싸였다. 아버지 진평왕에게는 두 동생이 있었지만 그들 역시 왕통을 이을 자격을 상실했다. 유일한 성골은 갈문왕의 딸 김승만이었다. 선덕은 승만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가 바로 진덕여왕이 된다. 귀족들이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한 번은 넘어갔지만 다시 여왕이 통치하는 것은 반대라며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의 중심은 선덕여왕이 신임하고 중용한 상대등 비담이었다. 그는 여러 귀족과 합세해 군사를 일으켰다. 김유신은 진압에 나섰지만 반란군의 세는 만만치 않았다. 전투는 일진일퇴를 거듭했고 그 와중인 647년 1월8일, 선덕여왕은 세상을 떠났다. 김유신은 마침내 승리하고 진덕여왕이 제28대 왕위에 올랐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최고 실력자로 부상하며 선덕여왕이 설계한 신라의 통치 체제의 완성에 크게 일조했다.

사진설명
선덕여왕 리더십에서 으뜸은 애민정신과 인재 등용이다. 선덕여왕에게는 삼국통일론도 중요했지만 그녀에게 우선 순위는 백성의 안정된 삶이었다. 선덕여왕은 매일 전쟁이 일어나고 생사를 걱정해야 하는 불안정한 삶에서는 통일론은 허망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백성과 관리, 귀족이 하나의 마음이 될 때 통일도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통일을 위한 전제 조건이 군사력이 아닌 민생 안정과 국민 통합이라는 선택은 올바른 리더십이었다. 여왕은 불사를 통해 국민들에게 정신적인 일체감을, 당나라 외교를 통해서는 힘을 기르는 방편을 찾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러한 리더십, 통치철학을 공유하고 실천할 수 있는 시스템, 즉 인재를 등용한 것이다. 집권 초기 올제를 상대등으로 기용했고, 종교에는 자장법사를, 그리고 국가의 기둥으로는 김춘추와 김유신을 기용해 국가의 기틀을 만들었다. 물론 선덕여왕이 여자 군주였기에 김춘추는 성장할 수 있었다. 아마도 남성 군주였다면 탁월한 능력, 혈통, 외교 감각, 인맥에서 완벽한 조건을 갖춘 김춘추를 경쟁자로 여겨 제거했을 수도 있다. 또 가야 출신 김유신에 군사권을 맡긴 선덕여왕의 대범함은 남성 군주보다 더 돋보이는 부분이다. 그리고 선덕여왕은 당 태종에게 수모를 받으면서도 국익을 위해 능동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했다. 당나라를 이용해 백제와 고구려의 군사적 위협을 견제하면서 선진 문물과 학문, 문화 제도를 받아들여 신라의 국력을 한 단계 높인 것이다. 선덕여왕에 대한 여러 평가가 있지만 삼국통일의 초석을 마련하고 또한 현명하고 관대한 마음으로 백성을 사랑하고 인재를 등용한 진정한 리더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글 박기종 커리어코칭 칼럼니스트 사진 픽사베이, 위키미디어]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819호 (22.03.08)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가 마음에 들었다면, 좋아요를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