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출 청소년들 새 아지트는 치킨집

이영빈 기자 2019. 12. 28.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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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연말 거리 떠도는 가출 청소년들

가출한 학생들은 연말을 평소보다 더 힘들다고 느낀다. 잘 곳이 줄어든다. 크리스마스나 새해 첫날은 집을 지키려는 부모가 많다. 같이 놀던 친구 몇 명은 집으로 돌아간다. 부모가 잘 오지 않아 평소 아이들과 아지트처럼 쓰던 곳이다. 돌아가는 친구를 보니 외로움도 커진다. "다른 명절은 별로 안 그런데, 연말에는 캐럴 나오고 불빛 번쩍이잖아요. 그러면 꼬맹이들이 엄마, 아빠 손잡고 가는 거 보면 괜히 부럽죠."

지난 성탄절 밤, 서울 노원구 '문화의 거리'가 온종일 북적거렸다. 큰 거리에서 빠져나와 조용하고 으슥한 골목으로 향했다. 가출 청소년들이 몰려다니기로 유명한 곳이다. 기자라는 신분을 밝히면 날 선 반응을 보일까 봐 걱정했다. 기우였다. 뭐든 물어보라고 했다. '왜 집으로 가지 않느냐'고 하자 기다렸다는 듯 돌아가며 답했다. "가면 ×× 갈구는데 당연히 가기 싫죠." "집이 없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거칠고 무서운 말들을 거리낌 없이 내뱉었지만, 사실은 관심에 기뻐하는, 영락없는 아이들이었다.

잘 곳이 없어 거리를 헤맨다. 정부에서 만든 가출 청소년 쉼터 시설보다 배달원으로 일하는 동네 치킨집에서 자는 게 더 편하다. 성매매 방식으로 얹혀살며 연말을 난다. 기자가 직접 가출 청소년 인터넷 카페에 "크리스마스인데 갈 곳이 없다"고 글을 올리니, 휴대폰이 계속 울렸다.

가출 청소년의 일상을 다룬 독립 영화 ‘박화영’의 장면들. 낮에는 단체로 카페 등에 있다가(위) 아침·밤에는 친구네 빈집에서 지낸다(아래). 연말에는 집 나온 아이들이 갈 곳은 더 줄어든다. /네이버영화

배달하고 성(性) 팔아 잘 곳 마련

서울 노원구에서 지내는 가출 청소년 김민성(가명·17)군은 연말이 싫다. 크리스마스나 새해 첫날 아침은 집을 지키려는 부모가 많다. 같이 놀던 친구 절반 정도가 집으로 돌아가고, 남은 김군을 포함한 아이들은 서로 '찐'(진짜를 뜻하는 10대 유행어)이라며 추켜세운다. 그러나 그것도 자정까지. 몸 누일 곳을 찾기 위해 뿔뿔이 흩어진다. 친구 집 아지트에 부모가 돌아와서 새로 묵을 곳을 찾아야 한다. 김군은 "어제(24일) 친구가 배달원으로 일하는 치킨집에서 잤다"고 했다. 일행 중 3~4명은 성(性)을 팔아 묵을 곳을 마련했다고 했다.

치킨이나 피자 같은 배달 음식점이 가출 청소년 사이에서 '아지트'로 뜨고 있다. 수요와 공급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음식점 사장들은 배달 주문이 많아지자 배달원을 늘려야 했고, 최저 임금을 주지 않아도 되는 미성년자가 눈에 들어왔다. '대신 잘 곳 없을 때 가게에서 자도 되느냐'는 요청이 잦다. 돈은 전부 계좌에 있어 훔쳐갈 것도 없으니 OK. '가끔 친구를 데려와도 되느냐'는 질문에는, 찬장에 라면 있으니 끓여 먹으라며 환심까지 산다. 영세 사업자와 가출 청소년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대목이다. 가출 청소년을 고용한 음식점 사장은 "옳지 않지만 많이 힘들어서 내린 선택"이라며 "아이들은 큰 말썽 없이 지내고 있다"고 했다.

갈 곳 없는 연말에는 성인 남성 집에 여러 명 얹혀살기도 한다. 남녀 청소년 3~4명이 머무는 대가로 여자 청소년들은 집주인과 성관계를 가진다. 하지만 최근에는 '각목'(미성년 여자가 남성에게 성매매하겠다며 속이고, 다른 무리가 현장을 급습해 협박하고 금품을 갈취하는 수법을 뜻하는 은어)을 무서워하는 집주인이 늘어나면서 얹혀살기는 어렵다고 한다.

실제로 이런 성매매가 이뤄지는지 확인해봤다. 지난 25일, 가출 청소년이 많이 찾는 인터넷 카페에 "서울 노원인데 잘 곳이 없다"고 글을 올렸다. 5분 만에 메시지가 왔다. 여자가 글을 올렸다고 착각한 모양이었다. 20분간 대화를 정리하자면 이랬다. "나는 신림동에 사는 30대 IT 기술자다. 연말이라 외롭다. 숙식을 제공하고 한 달 50만원 생활비를 주겠다. 성관계를 많이 가지지는 않겠다." 2960만원이 들어 있는 인터넷 뱅킹 계좌를 캡처해서 보내주며 "돈 많은 사람이니까 믿어달라"고 했다.

연말을 길에서 보내는 가출 청소년은 공통점이 있었다. 재혼 가정이거나 여러 사정으로 친척집에 얹혀살고 있었다. 한 청소년은 "그 ×(새엄마)은 온갖 스트레스를 저한테 푸는 것 같아요. 사이에서 어물쩍거리는 아버지도 싫고. 그래서 그냥 나왔어요"라며 얘기하기 싫다고 고개를 돌렸다. 부모가 세상을 떠나 친척집에 산다는 정모(16)군은 "이모부도 그렇고, 사촌도 그렇고, 아무도 잘못한 사람은 없어요. 그런데 제가 있으면 모두 불편해져요. 저는 친구들이랑 있는 게 더 편하고. 아마 그쪽도 마찬가지겠죠"라고 했다. 초면에 '연말에도 집에 안 들어가느냐'는 질문만 던졌는데, 기다렸다는 듯 줄줄이 말을 꺼냈다.

쉼터보다 거리가 편해요

전국 곳곳에는 가출한 학생을 위한 '청소년 쉼터'가 있다. 정부 시범사업으로 1992년 서울 YMCA에서 시작해, IMF 외환위기를 겪은 2000년 전후로 증가했다. 지난 7월 기준 134개소. 기간에 따라 일시(24시간~7일), 단기(3~9개월), 중장기(3년까지)로 나뉜다. 그러나 대부분 가출 청소년은 이를 잘 모르거나, 알아도 가지 않는다. 부모에게 연락이 가기 때문이다. 가출 청소년들은 "집이 싫어서 나왔는데 다시 집으로 돌아가라고 한다"며 "통금, 금연 같은 규칙도 적응하기 어렵다"고 했다.

지난 24일 밤 10시, 직접 서울의 한 일시 쉼터에 전화를 걸었다. 하루 잘 수 있겠느냐고 묻자 대뜸 '부모님에게 연락해야 한다'고 답했다. 2년 전쯤 부모가 자녀를 납치했다며 쉼터를 고소한 사건이 있었다. 현행법상 쉼터가 친권자를 찾으려는 노력 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있으면 약취 또는 납치 혐의를 받을 수 있다. "집에 들어가기 무섭다. 어떻게 안 되겠느냐"고도 물었지만 "여기서 잘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일단 여기 와서 이야기하자"는 답을 들었다.

학대가 의심될 때는 쉼터가 친권 제한이나 접근 금지를 신청할 수 있지만, 현장에서는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검찰에 청구해 밟는 법적 절차는 3개월 넘게 걸린다. 그 사이 상처가 낫는 등 폭행 증거가 사라져 입증이 어렵다. 수사기관에서는 '잘하겠다'며 머리를 조아리고 다시 자녀를 학대하는 부모가 부지기수라고 한다. 집이 싫어 나온 아이들이다. 집에 돌아가라는 쉼터는 당연히 찾지 않는다.

무조건 집에 보내지는 말아야

쉼터 중에서도 찾아온 청소년에게 부모 연락처를 묻지 않는 곳이 있다. 서울시의 한 여성 청소년 전용 쉼터다. 이곳은 낮 또는 밤에 청소년들이 잠깐 '이용'할 수 있다. 물론 크게 다쳤거나 도움이 필요해 보이면 다른 기관으로 인계한다. 이 쉼터 관계자는 "무조건 집으로 돌려보내기보다는 '왜 집을 나왔는지'부터 궁금해해야 한다"고 했다. 경기 부천시 '청개구리 식당'도 비슷하다. 아이들에게 급식만 제공할 뿐, 다른 간섭은 일절 없다.

전문가들은 "가출 청소년과의 접촉 면적을 늘리는 게 우선"이라며 "실질적 도움은 그다음 맞춤형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기남 한국청소년쉼터협의회장은 "서울시에 청소년들이 '이용'할 수 있는 쉼터는 네 곳 정도"라며 "이용 시설은 보호 시설과 달라 상대적으로 법적 책임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더 늘어나야 한다"고 했다. 정익중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쉼터를 찾은 청소년이 다시 거리로 나가지 않게 친밀감 형성에 능숙한 인력을 기르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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