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도 어려운데 집값은 천정부지.. 일찌감치 '독립' 포기 [연중기획 - 청년, 미래를 묻다]

이강진 2019. 12. 29.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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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품 못 떠나는 '캥거루족' / 청년문제 넘어 복합적 사회문제 대두 / '성인=독립' 이제는 사실상 성립 안 돼 / 고용정보원 설문 결과 54% 독립 못해 / 자존감 낮고 우울감·스트레스는 높아 / 독립 못하는 가장 큰 이유 '경제능력' / 기혼 직장인 15% "돈 없어 분가 못해" / 자립했다 다시 품 찾는 '리터루족'도 / "파격적 지원·구조적 안전망 마련을"
#1 지난해 대학을 졸업한 A(26)씨는 여전히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한 채 생활비를 받아 쓰는 ‘캥거루족’이다. 최근 A씨는 부모님의 뒷바라지에도 높은 취업 문턱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시며 깊은 우울감에 젖어 있다. 그는 “하루빨리 ‘아기 캥거루’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취업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작정 독립할 수는 없지 않으냐”며 “취업 스트레스와 함께 부모님께 손을 벌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계속되니 심리적으로 괴롭다”고 씁쓸해했다.
 
#2 2년 전 수도권의 한 중소기업에 취직한 최모(27)씨도 아직 부모님으로부터 숙식을 제공받는 처지다. 취업 직후 월세방을 구해 독립하는 것도 고려했지만, 이내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낮은 급여에 불안정한 고용조건, 높은 방세와 생활비 등을 고려하면 독립은 ‘그림의 떡’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최씨는 “언제 그만둬야 할지 모르는 직장에서 다달이 나갈 월세가 걱정돼 독립을 포기했다”며 “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조금씩이라도 돈을 모으고, 차후 안정이 되면 기회를 봐서 독립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성인이 되면 독립한다’는 말은 사실상 성립하지 않는 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취업난·고용 불안정·집값 문제 등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고질병들을 떠안을 수밖에 없는 청년들이 부모의 품을 떠나지 못한 채 ‘캥거루족’으로 남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된 지 오래다. 캥거루족 현상은 단순한 ‘청년 문제’를 넘어 복합적 인과관계에 따른 사회 문제인 만큼 ‘파격적’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캥거루족’의 스트레스·우울 더 높아

25일 전북대 이상록 교수(사회복지학) 연구팀의 ‘성인이행기 거주형태가 청년들의 심리 정서에 미치는 영향’ 논문에 따르면, ‘캥거루족’ 청년들이 부모에게서 독립한 청년들보다 자존감은 낮고 스트레스 및 우울 정도는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이 4년제 대학교 이하의 학업을 마친 25∼39세 청년 5760명 대상 한국고용정보원 통계를 분석한 결과, 우리나라 청년 과반(54%)은 부모에게서 독립하지 않은 채, 동거하고 있는 것으로도 파악됐다. 이 교수는 “부모의 경제력뿐 아니라 청년들의 고용상태나 임금수준이 부모와의 동거 여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조사됐다”며 “저소득·비정규직·미취업 등으로 인해 부모에게서 독립하지 못한 청년들이 심리 정서적인 문제들을 더 많이 겪고 있다”고 설명했다.
연구팀은 ‘부모와의 동거를 사회 규범 및 가치에 부합되지 않는 거주형태’로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이 캥거루족 청년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주요 요소로 꼽았다. 일각에서 캥거루족 현상에 대해 ‘우리 사회가 성인 자녀의 부모 동거를 관대하게 바라보는 인식 탓’이라거나, ‘독립심·자립심이 부족한 청년들이 부모와의 동거를 더 편하게 여기기 때문’이라는 해석과는 달리 우리 사회에도 ‘나이 들면 독립해야 한다’는 규범이 상당 부분 작용한다는 것이다. 최근 취업에 성공한 김모(26)씨는 “취업만 하면 당연히 독립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월급과 방세를 대조해보니 (독립을) 선택하기 어려워졌다”며 “취업 후에도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은 여전하다”고 말했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캥거루족’ 신세

청년들이 이러한 심적 고통을 감수하면서 캥거루족을 선택하는 이유는 결국 ‘경제적 어려움’이 큰 탓이다. 구인구직 플랫폼 사람인이 올해 초 발표한 캥거루족 관련 설문조사(성인 남녀 1046명 대상)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 중 59.8%, 직장인 응답자 중 40.9%가 “나는 캥거루족”이라고 답했다. 직장에 다니면서도 부모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이유로는 ‘월급이 적어서(69.3%,복수응답)’, ‘목돈마련을 위해서(31.2%)’, ‘빚이 있어서(18.6%)’ 등을 꼽았다.
특히 이 조사에선 기혼 직장인 응답자 중 15.1%가 스스로 캥거루족이라고 밝히면서, 결혼이나 경제적 자립 이후에도 주거비용·경력단절·육아 문제 등의 이유로 다시 부모와 함께 살거나 경제적으로 지원받는 ‘신(新)캥거루족’, ‘리터루족(돌아가다는 뜻의 영어 리턴(return)과 캥거루족의 합성어)’ 현상도 눈에 띈다. 김윤태 고려대 교수(사회학)는 “(캥거루족 현상은) 일차적으로 우리 사회의 전통적 가족주의의 영향이 있지만, 최근에는 경제 불황에 따른 취업난이나 비정규직 문제 등으로 청년들의 소득이 줄어든 점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한국 사회에선 모순적으로 청년들이 가장 취약한 계층이 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고질적 문제점들을 온몸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청년들이 결국 캥거루족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인식 바꾸고 파격적 지원 있어야”

독립의 요건으로 청년들에게 과도한 ‘물질적 밑바탕’을 요구하는 사회적 인식도 캥거루족 현상의 한 문제점으로 꼽힌다. 송재룡 경희대 교수(사회학)는 “청년들을 더욱 위축시키는 것은 ‘결혼해서 살 집을 마련하지 못하면 결혼도 할 수 없다’는 부담감 등 우리 사회에 형성돼 있는 일종의 사고방식”이라며 “‘독립적 삶의 조건’에 대한 우리의 가치관이 과도하게 설정된 부분이 있다”고 꼬집었다.

 
이어 송 교수는 “어려움에 빠진 청년들에 대해 정확히 통찰하고, 사회 구조적 안전망에 대해 깊이 있게 고민해야 한다”며 “현재는 청년들을 향한 정치인들의 과장된 제스처만 있을 뿐, 구체적인 해법은 내놓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비판했다. 김 교수는 “비정규직과 정규직 사이의 차별 해소, 취업훈련 기회 및 청년 주택 확대 등 청년들이 독립해서 살 수 있는 파격적인 지원이 있어야 한다”며 “그렇지 않다면 청년들이 계속 ‘세습 사회’를 비판하는 등 비관적인 사회 분위기가 이어지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부모 캥거루’ 경제·심리적 어려움 가중 “이중 부양 ‘실버 푸어’ 정책적 관심 절실”

취업난·고용 불안정·집값 문제 등으로 부모의 품을 떠나지 못하는 ‘아기 캥거루’ 청년들 못지않게, 이들을 부양해야 하는 ‘부모 캥거루’들의 경제적·심리적 어려움도 가중하고 있다.

25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저출산·고령사회 대응 국민 인식 및 욕구 모니터링’ 보고서에 따르면, 캥거루족 자녀를 부양하는 부모 10명 중 4명은 자녀에 대한 경제적 지원에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11월 50∼69세 남녀 2022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중 39.1%가 ‘캥거루족 자녀가 있다’고 답했고, 이들 중 19.1%는 경제적 지원에 ‘매우 부담된다’, 22.1%는 ‘다소 부담된다’고 응답했다.

특히 소득계층이 낮다고 생각하는 응답자들의 부담감이 높았다. 소득 상위 계층의 경우 12.6%만 경제적 부담을 느낀다고 답했지만, 중하위층(52.5%)과 하위층(53.9%)은 절반 이상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답했다.
캥거루족 자녀를 부양하고 있는 최모(53)씨는 “아직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부양에 큰 부담은 없지만, 은퇴 후를 생각하면 막막하긴 하다”며 “(자녀가)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실제 위로는 부모를 부양하고, 아래로는 캥거루족 자녀를 뒷바라지하는 ‘이중 부양’의 늪에서 베이비부머 세대들이 은퇴 후 ‘실버 푸어(빈곤 노년층)’로 전락할 위험성도 큰 상황이다. 김윤태 고려대 교수(사회학)는 “(캥거루족 부모인) 베이비부머 세대들은 은퇴자금도 모으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며 “은퇴 후 빈곤층으로 살아가야 할 이들을 위한 정책적 관심도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캥거루족 자녀가 부모와 동거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부모의 경제적 부담은 커지고, 이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가족 간 갈등이 사회 문제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상록 전북대 교수(사회복지학)는 “일본의 경우처럼 부모와 오랫동안 동거한 나이 든 캥거루족 청년들이 부모와 불화를 겪거나, 이로 인해 사건·사고가 벌어지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며 “(정부가) 부모와 함께 살 수밖에 없는 캥거루족 청년들을 위한 주거정책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강진 기자 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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