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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한남동 명품시계점에 간 수거책…3세대 보이스피싱 수법은

중앙일보

입력

지난 8월 말 인천서부경찰서 보이스피싱 전담팀으로 공익제보가 접수됐다. 보이스피싱 범행에 명품시계와 금괴가 이용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제보자는 보이스피싱 현금 수거책으로 일한 적이 있다고 했다. 경찰은 제보자 A씨의 협조를 받아 일당의 행적을 추적했다.

보이스피싱 조직이 명품 시계점에서 구입한 시계. 시가로 1억2000만원 상당이다. 사진 인천서부경찰서

보이스피싱 조직이 명품 시계점에서 구입한 시계. 시가로 1억2000만원 상당이다. 사진 인천서부경찰서

1억 원대 명품시계를 왜? 

“신분증을 가지고 한남동 명품 시계점으로 가세요.”
정체 모를 이로부터 걸려온 전화로 A씨가 받은 첫 번째 지시였다. 시계점에 들어서자 주인은 신분을 확인한 뒤 준비한 시계를 건넸다. 시가 1억2000만원 상당의 스위스 명품 시계였다. 시계를 받자 “다른 금은방에서 시계를 현금으로 교환하라”는 두 번째 지시가 내려왔다. 일정 금액 이상으로 팔아야 한다는 당부도 있었다. 그러나 A씨는 시계를 팔지 못했다. 물건을 급히 처분하려는 그를 수상하게 여겨 명품 시계점에서 제값을 주지 않으려 한 탓이다. 그러자 과거 금은방에서 일했던 보이스피싱 조직원 ‘B과장’이 나섰다. 지난 9월 30일 종로의 한 금은방 앞에서 A씨와 B씨가 만나는 순간 전담팀이 현장을 덮쳤다.

사전 약속으로 명품시계 사서 현금화

경찰이 파악한 범행의 전모는 기상천외했다. 지난 여름 중국에 거점을 둔 보이스피싱 조직은 경기도 수원에 사는 70대 노인을 범죄 타깃으로 잡았다. 주위와 교류가 뜸하고 홀로 사는 점을 노린 것이다. 이들은 검사를 사칭해 노인에게 “당신의 계좌가 보이스피싱 범죄에 연루돼 있으니 다른 통장 계좌로 돈을 이체해야 한다”고 속였다. “지금 당장 돈을 보내지 않으면 처벌받을 수 있다”는 협박에 노인은 6억여 원을 B씨 일당이 알려준 계좌 여러 곳에 나눠서 이체했다.

보이스피싱 일당이 이용한 서울의 한 명품 시계점. 사진 인천서부경찰서

보이스피싱 일당이 이용한 서울의 한 명품 시계점. 사진 인천서부경찰서

노인이 돈을 입금한 계좌는 서울 시내 명품 시계점과 금은방 명의였다. 사전에 B씨 일당이 거래하기로 약속한 곳들이었다. 앞서 B씨 일당은 매장에 연락해 특정 금액에 맞는 시계를 주문했다. 매장 명의 계좌로 그 금액을 입금할 테니 약속한 시각에 특정 인물이 찾아가면 예약한 물건을 넘기기로 약속한 것이다.

이들은 수거책을 시켜 명품시계를 받은 뒤 다른 매장에서 시계를 다시 처분하게 했다. 그렇게 두 단계를 거쳐 ‘세탁’이 끝난 현금을 중간책을 통해 최종 수령하는 방식이었다. 경찰은 사기 등 혐의를 받는 B씨 일당의 여죄를 캐는 한편 명품 시계점 등에 대해 사기 방조, 장물취득죄 등의 혐의를 적용할 수 있을지 검토하고 있다.

계좌 이체, 대면 편취에서 명품거래 방식 등장

명품시계 등 귀중품을 이용한 수거 방식은 최근 새로 등장한 수법이다. 수사기관은 보이스피싱 조직이 범죄에 이용할 은행 계좌를 사들이는 게 어려워지자 변형된 방법을 고안한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 10월엔 한 보이스피싱 조직이 해외 결제가 됐다는 문자를 보내 피해자들을 속이고 서울의 한 금은방 계좌에 돈을 입금하도록 유도한 뒤 6억8000만원 어치 금을 가져가기도 했다. 앞서 인천서부서 사건과 비슷한 사례가 전국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는 게 경찰의 설명이다.

보이스피싱 발생 건수.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보이스피싱 발생 건수.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2000년대 초반 ‘1세대’ 보이스피싱 범죄는 대포통장 등을 이용한 계좌 이체 방식이 주를 이뤘다. 대면 편취는 ‘2세대’ 수법으로 볼 수 있다. 100만원 이상을 인출하려면 입금 후 30분이 지나야 하는 ‘지연 인출’ 제도가 시작되면서 수법이 달라졌다. 최근엔 명품을 이용한 현물갈취라는 ‘3세대’ 수법으로 흐름이 바뀌는 모양새다.

지난달엔 보이스피싱에 사용하는 발신번호 ‘변작(변환작업)’ 중계기를 모텔 TV 선반 뒤나 침대 아래에 숨기거나 차량에 설치해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추적을 피하던 일당이 검거되기도 했다. 인천서부서 보이스피싱 전담팀 황학선 경감은 “기술이 발달하면 보이스피싱 수법도 진화한다. 수사기관은 물론 금융당국과 통신사 등과 협조해 대처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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