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발’이 왜 거기서 나와… 언어의 품격, 선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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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1.10.04. 오전 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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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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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욕설 파는 사회


시발….

욕설처럼 들리지만, 빠져나갈 구멍은 있다. 동음이의어다. 최근 BC카드에서 내놓아 화제를 모은 신용카드 이름은 ‘시발(始發) 카드’다. 출발을 뜻하는 욕설의 동음이의어를 활용해 개발한 사회 초년생 겨냥 신상품이다. 이름은 ‘시발비용’이라는 인터넷 용어에서 따왔는데, 커피·쇼핑·택시 등 말 그대로 스트레스 받아 홧김에 욕하면서 쓰게 되는 돈이라는 뜻의 조어다.

욕설은 자극적이며 즉각적인 관심을 야기한다. 유명 배구선수 김연경은 경기 도중 화를 참지 못하고 두 음절의 쌍욕을 내뱉는 장면이 카메라에 포착돼 유명세를 탔다. 일부 팬들이 해당 욕설을 발음할 때 입 모양이 유사한 ‘식빵’에 착안해 김연경을 “식빵 언니”라 부르기 시작했고, 도쿄올림픽으로 김연경의 인기가 치솟자 SPC삼립은 지난달 식빵 제품 ‘식빵 언니’를 출시했다. 과정이 복잡하긴 하나 결국 욕설에 기반한 네이밍 마케팅인 셈이다.

욕설을 활용한 상품이 연이어 등장하며 갑론을박이 일고 있다. 재미를 추구했으나 오히려 “불편하다”는 의견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본지 의뢰로 SM C&C 설문조사 플랫폼 ‘틸리언 프로’가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 성인 남녀 503명 중 “욕설 마케팅에 거부감이 든다”고 답한 비율이 58.3%로 압도적이었다. “마음에 든다”고 답한 비율은 13.5%에 불과했고 “판단 보류”는 28.2%로 집계됐다. 거부감의 이유로는 “품격이 떨어져서”가 81.3%로 가장 높았다. 최근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는 ‘시발’의 상품화에 대해 “저게 기발해 보인다고 생각하는 건가? 볼수록 저급하다”는 한 대형 증권사 직원의 글이 올라왔고, 포털 사이트 댓글에서도 “무난함과 평범함은 도태되고 오로지 자극에만 중독된 사회”라는 비판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언어유희를 통한 욕설 마케팅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1955년 첫 국산 자동차 이름도 시발(始發)이었다. 그러나 점차 방만한 언어를 공개적 영역에서 사용하는 것에 반감을 느끼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한때 탈(脫)권위의 화법으로 유행했던 “쫄지마, 시바” 유의 내리막길이라는 것이다. 2017년 LG생활건강 측이 시바견(犬)을 캐릭터로 내세운 치약을 판매하며 “이 닦고 잠이나 자라 시바” 같은 홍보 문구를 써 구설에 올랐고, 발음 탓에 자주 욕설로 소환된 2018년 마지막 날 주류 회사 보해양조는 “안녕! 잘 가라, 18年아”라는 글을 페이스북 계정에 올렸다가 대중의 뭇매를 맞았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대중 매체에서 범람하는 원색적인 소통 방식 탓에 사람들이 언어의 품위를 희구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언어 감수성의 변화도 요소로 꼽힌다. 페미니즘과 정치적 올바름(PC) 등의 부상으로 인해 언어 사용에 깐깐한 잣대를 들이대는 경우가 늘어난 데다, 특히 욕설이 여성 혐오적 표현과 관련된 경우가 많은 탓이다. 지난 1일 국정감사에서는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김승수 의원이 “청소년의 언어 폭력 문제가 심각하다”며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이른바 ‘형수 욕설’ 음성을 국감장에 트는 웃지 못할 상황이 전개되기도 했다. 언어 비속화의 이유로 “정치인이나 고위 공직자 등 유명 인사들의 막말이 난무하고 또 인터넷으로 여과 없이 국민들에게 노출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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