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중은행에서 5년째 일하는 조모(27)씨는 이직을 준비하고 있다. 지금 직장에 큰 불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직하고 싶은 회사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리멤버, 원티드 같은 채용 플랫폼에 이력서를 올려놓았다. 지난달엔 로스쿨 입학을 위한 법학적성시험(LEET)에도 응시했다. 조씨는 “친구들 중에 대기업에서 스타트업으로, 일반 공기업에서 대학원 진학으로 진로를 바꾼 경우가 많아 나도 조바심이 난다”며 “좋은 직장에 일찍 취업했다고 좋아했지만 내 가치를 증명받기 위해선 이직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직장 생활을 하는 20~30대 직장인 가운데 “이직을 못하면 도태된다”는 불안감에 쌓여있는 이직 조바심족이 늘고 있다. ‘평생 직장’을 최고로 여겼던 이전 세대와 달리, ‘프로 이직러’라고 불릴 만큼 이직이 일상화된 MZ세대의 지배적인 분위기가 낳은 세태다. 주변에서 이직을 통해 연봉이 껑충 뛰었거나 스톡옵션을 받아 대박을 터뜨린 사례를 접하다 보니, 한 회사에 오래 근무하는 데 대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김석호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평생 직장 신화가 깨진 상황에서 한 직장에만 머물러 있는 경우 불안감을 느끼고 ‘자기 증명’을 위해 이직을 하는 게 젊은 세대의 트렌드가 됐다”면서도 “젊은 직원들의 잦은 이직은 기업이나 사회적 측면에선 엄청난 낭비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젊은 층 사이 ‘도태 상징’된 장기 근속
지난 5월 평생교육 업체 휴넷이 입사 3년 차 이하 직장인 561명에게 ‘지금 다니는 회사를 얼마나 다닐 걸로 예상하는가’라고 설문한 결과, 응답자들이 답한 예상 근속 기간은 평균 2.8년에 불과했다. 1~2년을 예상한 응답자가 27.3%로 가장 많았고, 2~3년이라고 답한 비율이 20.2%로 다음이었다. ‘1년 미만’으로 예상한 비율도 9.3%나 됐다. 반면 5년 이상 현 직장을 다닐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전체의 15.3%에 그쳤다. 평생 직장 관념 자체가 없는 MZ세대의 인식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기업 인사 담당자들은 “요즘 입사자들 중에는 직장을 다음 단계로 가는 하나의 스펙으로만 여겨 1~3년 정도 짧게 회사에 다닐 목적으로 입사하는 ‘잡호핑’(job hopping)’족도 적잖다”고 말한다.
이처럼 이직을 당연시하는 분위기 속에서 한 직장에서 오래 근속하는 젊은 직장인들은 되레 불안감을 느낀다. 5년 차 직장인 송모(28)씨는 “한 직장에서 5년 차가 됐다고 하면 친구들은 ‘그렇게 오래 다녔냐’ ‘언제 이직하느냐’고 질문을 한다”고 말했다. 송씨는 “회사원이던 한 친구가 의대에 가겠다며 작년에 수능을 다시 봤고 대기업에서 3년간 일한 한 친구는 외국계 기업으로 최근 이직했다”며 “지금 회사에 만족하긴 하지만 한 직장을 오래 다닐 생각을 하는 내가 게으른 건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국내 대기업 2년 차 직장인 이모(29)씨도 “입사 동기가 스타트업으로 이직하거나 친구들이 ‘젊을 때 좀 더 힘든 일 해봐야지’라는 말을 할 때면 내가 안주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이직했다 후회도… ”기업이 MZ직원 자아실현 기회 늘려야”
하지만 ‘잦은 이직=몸값 상승’이라는 공식이 반드시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이직 열풍에 이직이나 퇴사를 했다가 후회하는 사례도 적잖다. 2020년 한 외국계 아웃도어용품 회사에서 국내 패션 대기업으로 이직한 박모(34)씨는 지금 회사의 낮은 임금인상률 때문에 이직을 후회한다고 했다. 박씨는 “이직 당시엔 연봉이 더 높아졌지만 임금인상률이 3% 안팎으로 낮아 다른 곳으로 또 이직해야 하나 고민 중”이라고 했다. 주변의 이직 성공 사례를 보고 섣불리 퇴사를 했다가 구직 과정이 길어져 낭패인 경우도 많다. 작년 초 스타트업으로 옮긴 김모(32)씨는 “상장 가능성을 보고 스타트업으로 옮겼는데 증시 상황 탓에 대박의 꿈이 사라지게 생겼다”고 말했다. 실제로 카카오모빌리티나 마켓컬리 같은 대어급 스타트업에서도 상장 지연에 따른 직원들의 불만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 스타트업 관계자는 “단기간에 돈을 벌 목적으로 무턱대고 이직을 했다가 후회하는 직원들도 적지 않다”면서 “기업들은 젊은 직원들이 회사 내에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줘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