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항서 "잘 져야한다"···이 낯선 도전에 '매직'이 있다

입력
수정2020.01.01. 오전 8:34
기사원문
송지훈 기자
본문 요약봇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박항서 베트남 축구대표팀 감독
각자 맡은 임무 제대로 해내야
팀이 최선의 결과물 낼 수 있어

밖에 나오니 국내 갈등 더 잘 보여
마음 모을 수 있는 길 고민했으면

인도네시아 축구팀 맡은 신태용
적 아닌 파트너로 함께 발전할 것
[희망인] 박항서 감독
박항서 베트남 축구대표팀 감독이 2020년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베트남 축구를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본선에 진출시켜 ‘박항서 매직’을 한 번 더 보여주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김성룡 기자
2019년 한국 사회는 유독 갈등하고 분열했다. 2020년 경자년(庚子年)엔 화합과 포용이 함께하길 기대한다. 보이지 않는 가운데 길을 내고 타국의 영웅으로 우뚝 선 박항서(63) 감독을 중앙일보가 만난 이유다. 예순. 그에겐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보였다. 2002년 월드컵 때 잠시 반짝했고, 국가대표팀 감독이 됐지만 석 달 만에 물러났다. 프로팀 감독에 이어 실업팀으로 옮겨야 했다. “속도를 줄이고 주위를 돌아보니 오히려 더 쉽게 빨리 갈 수 있는 길이 보이더군요.”

꿈, 도전 그리고 성취. 누구나 갈구하지만 쉽사리 잃곤 한다. 그는 달랐다. 예순이던 2017년 9월 낯선 나라로 갔다. 축구 인생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그러자 매직이 펼쳐졌다. 박항서 베트남 축구국가대표팀 감독이다.

“대한민국의 2020년은 모두가 한 발자국씩만 천천히 가면서 더 큰 그림을 그리는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그의 얼굴엔 미소가 번졌다. 매일 분 단위로 쪼개 쓸 정도로 바쁜 삶을 살고 있지만 2020년을 맞이하는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도 마음이 여유롭다고 했다. 지난 연말 중앙일보와 만난 그는 “평생 앞만 보고 달리다 베트남에 건너가 뒤늦게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그 순간에 대해 “머리를 탁 때리고 가는 게 있었다”고 표현했다. 그의 말이다.

“지금 63세인데 언제까지 일할 수 있을까. 70? 내 감독 수명이 7년밖에 없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뭘 해야 할까, 뭘 해야 의미가 있을까, 왜 남한테 상처 주는 소리를 하지, 뭐하러 싫은 소리를 하지? 아웅다웅할 필요도 없는데….”

박항서 베트남 축구대표팀 감독. [연합뉴스]
박 감독은 “지금까지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속도를 줄이고 차분히 주위를 돌아봤다”고 했다. 뒤처지는 게 아닌가 긴장하고 걱정도 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쉽고 빠른 길이 보이더라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 얘기를 했다. 그는 “함께 섞여 살 땐 잘 몰랐는데, 밖에 나와 보니 한국에서 세대와 지역·성별·이념 같은 것들로 나뉘어 갈등하는 모습이 안타깝다”면서 “사실 어디나 다 있는 것이고 이를 어떻게 서로 좁히느냐가 관건일 텐데, 한 박자 쉬면서 무엇이 최선인지, 어떻게 하면 마음을 모을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할 기회를 얻길 바란다”고 했다. 이어 “특히나 힘들어 하는 청년들을 위해 기성세대가 먼저 손을 내밀고, 비전을 보여줘야 할 때”라고 조언했다.

그가 평소에 강조해 온 일종의 팀워크, 바꿔 말하면 통합이다. 그리고 자신보다 동료들을 앞세우는 마음, 감독과 선수가 서로 상대 입장에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배려심이다. 박항서 매직의 요체이자 2020년 ‘혼란의 신년’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절실한 가치다.


Q : 베트남 정신도 결국 팀워크인가.
A : “감독은 선수 입장에서, 선수는 감독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면 잘못될 게 없다. 원팀을 만들려면 나보다 우리가 우선이란 원칙이 확고하게 잡혀야 한다. 그 원칙이 살아 있는 속에서 자율이 주어진다. 책임과 의무를 본인들이 느껴야 한다.”

숫자로 보는 박항서

Q : 멋있게 이기는 것보다 잘 지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도 했다.
A : “우승 한 번 하고 나면 많은 사람이 몰려와 칭찬해 주는데, 그런 것에 일희일비하지 말아야 한다. 인기라는 거, 명예라는 건 어느날 갑자기 연기처럼 사라진다. (내가) 2002년에도 겪었다. 정말 오랫동안 밤잠 안 자며 준비한 경기도 90분 만에 끝난다. 결과도 나온다. 지난해 스즈키컵에서 우승했다고 온 나라(베트남)가 난리였는데 내년(2020년)에 또 스즈키컵에 나가야 한다. 우승하기 위한 도전이 지나면 지키는 도전이 오는 것이다. 그러니 질 때 잘 져야 한다. 뭘 배울 게 있는지 잘 들여다봐야 한다.”


Q : 스스로 우승할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지 못하면서 선수들에게 우승하라고 주문할 수 없다고 했었다.
A : “내가 이기기 힘들 거라고 생각하면 선수들도 절대 못 이긴다. 호주와 눈 오는 날 붙었는데 우리 선수 중엔 태어나서 눈을 처음 본 아이도 많았다. 그럼 우리가 포기해야 하나? 선수들에게 ‘호주 선수들은 키가 큰 대신 무게중심이 높아 눈 오는 날 불리하다. 우리는 작은 대신 중심이 낮아 미끄러운 환경에서 훨씬 유리하다’며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줬다. 장군이 이긴다고 확신을 못하는데 병사들이 싸울 수 있겠나. 공격으로 안 되면 수비로, 정공법으로 안 되면 허를 찔러서라도 이길 방법을 찾아서 선수들에게 확신을 심어줘야 한다.”


Q : 나 혼자 모든 걸 잘할 수 있다는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는 말도 했는데.
A : “모든 팀이 결과물을 내기까지는 각자의 맡은 임무가 있다. 공수(攻守)에서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누굴 도울 수 있겠나. 나도 꽤 오래 축구 밥을 먹고 있지만 모든 분야에서 전문가는 아니다. 내 경험만 믿으면 안 된다. 식단, 운동 방법, 치료, 전술 등 각자의 영역에서 전문가들의 조언을 받아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는 게 감독으로서의 내 역할이다.”

1년 만의 재경매에서 1390만원에 낙찰된 박항서 초상화 ‘나의 스승’. [사진 베트남 소하 캡처]
베트남 축구대표팀은 미답(未踏)의 목표를 향하고 있다. 도쿄 올림픽 본선과 카타르 월드컵 최종예선 진출이다. 박 감독은 “이제 동남아에서 올라선 수준”이라며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지만 노력만으로 모든 걸 이룰 순 없는 단계가 반드시 온다. 지금은 앞만 보고 달릴 때가 아니라 우리에게 부족한 게 뭔지, 어떻게 보충할 수 있는지 배우고 깨달아야 하는 시기”라고 했다.

박 감독이 베트남에서 큰 성공을 거두면서 동남아시아에 ‘축구 지도자 한류’ 바람이 확산하는 분위기다. 박 감독 자신은 지난해 11월 20만 달러(약 2억3000만원) 수준이던 기존 연봉을 대폭 올려 베트남축구협회와 재계약(연봉 12억원 추정)했다. 지난해 12월에는 신태용(50) 전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이 인도네시아 지휘봉을 잡았다. 정해성(62) 호찌민 FC(베트남) 감독을 비롯해 동남아 클럽 축구에 도전하는 지도자들도 늘고 있다. 박 감독은 “절친한 후배이자 동생 (신)태용이가 이웃 나라로 건너온 게 반갑기도 하지만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라며 웃어보인 뒤 “때로는 경쟁하고, 때로는 협력하겠다. 적이 아니라 파트너로 여기면서 서로를 거울 삼아 함께 발전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송지훈 기자 milkyman@joongang.co.kr


노후경유차 과태료 35만원 피하려면? 먼지알지!
중앙일보 '홈페이지' / '페이스북' 친구추가

ⓒ중앙일보(https://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자 프로필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사회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