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화 변곡점, 47살→57살…‘진보가 다수’인 사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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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0.11.17. 오전 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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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수의 ‘진보를 찾아서’ _10
2016년 11월19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요구 4차 범국민대회. 어린아이와 함께 나온 30~40대 모습이 많이 눈에 띈다. 이들이 지금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을 떠받치는 핵심 기반이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젊은 시절, 특히 20대 초반의 역사적 경험은 세대 전체에 큰 영향을 끼친다. 흔히 586세대라 불리는 50대에겐 1980년 ‘광주 학살’이 그런 예였다. 20살 무렵에 시민의 힘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노무현을 봤고 7년 뒤엔 그의 비극적 죽음을 목격했던 ‘집단 경험’이 30~40대를 우리 사회의 가장 뚜렷한 진보 세대로 만들었다.

내년 4월 서울·부산 시장 선거를 향한 관심이 뜨거워지고 있다. 4월 총선 직후만 해도 당분간 전국 선거에서 야당인 국민의힘이 승리하는 건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총선 직후인 4월28~29일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더불어민주당 지지율은 43%, 국민의힘 전신인 미래통합당은 19%였다.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64%에 달했다. 지난주 문 대통령 지지율은 46%로 떨어졌다.

정당 지지율 변화는 좀 더 가파르다. 서울과 부산 지역에서 민주당과 국민의힘 지지율이 거의 붙었다는 여론조사 결과(11월7~9일 리얼미터)도 나왔다. 두곳 모두 민주당 소속 단체장의 젠더 이슈 관련 중도사퇴 또는 유고로 보궐선거가 치러지는 점은 20·30대 여성 지지세가 강했던 민주당엔 아프게 작용한다. 급하게 당헌을 고쳐 서울과 부산 시장 후보를 내기로 한 점도 궁색하다. 현 정부의 부동산정책에 대한 부정 평가는 출범 이후 최고치(68%, 11월3~5일 한국갤럽)를 기록했다. 어느 것 하나 민주당에 쉬운 게 없어 보인다.

집권 후반기에 치르는 큰 선거는 대체로 여당보다 야당에 유리하다. 대통령 지지율은 떨어지고, 집권세력의 각종 실책과 비리가 평가의 초점이 되기 쉽다. 이런 상황은 야당 지지층을 결집하고 여당 지지층은 이완시킨다. 그러나 내년 봄 보궐선거가 야당에 꼭 유리하다고 볼 이유가 없다. 지금의 기본적인 정치지형이 민주당에 유리하게 형성돼 있는 탓이다.

대통령제에서 선거는 집권당보다 대통령 지지율의 영향을 더욱 민감하게 받는다. 집권 4년차인 문 대통령 지지율은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좋은 편이다. 11월10~12일 한국갤럽 조사를 보면, 문 대통령 국정운영에 대한 긍정-부정 비율은 각각 46%-45%로 엇비슷하다. 눈여겨볼 건, 뚜렷한 계기가 없는데도 국정운영 긍정 여론이 1주일 전에 비해 3%포인트 오른 점이다. 문 대통령 지지율은 정치적 악재를 만나면 40% 선까지 내려갔다가도 곧바로 40% 후반대를 회복하고 있다. 이 지지율의 복원력이 현 정치지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집권세력에 유리한 ‘진보 우위의 정치지형’이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 점에서 공화당이 완전히 유권자의 외면을 받았던 1930~60년대 미국 정치상황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한 정당에 대한 유권자 지지 강도는 그 정당을 상징하는 인물의 선호도로 표현된다. 미국에서 1860년대 이후 오랫동안 흑인들이 공화당을 강하게 지지한 건, 노예해방을 선언한 링컨이라는 상징 인물에 힘입은 바 컸다. 이걸 바꾼 게 1932년 대통령에 당선된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스벨트였다. 루스벨트 이후 흑인 유권자는 민주당 지지기반으로 변했다.

한국 보수정당의 상징 인물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시기 시기마다 약간의 굴곡이 있지만 1979년 10·26 이후 이 흐름은 변한 적이 없다. 더불어민주당의 상징 인물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2000년대 초반까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상징 인물이었지만, 2009년 서거 이후 특히 젊은 세대에게 노 전 대통령은 ‘민주당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여론조사기관 한국리서치가 2012년부터 4년 단위로 세차례 실시한 ‘박정희·노무현의 호감도 변화’ 조사결과는 눈여겨볼 만하다. 2012년 4월 조사에서 박정희·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의 호감도는 각각 66%, 67%로 비슷하게 나왔다. 20대(노무현 81%, 박정희 46%)와 30대(노무현 84%, 박정희 53%)에선 노 전 대통령이 압도적으로 높았지만, 50대(박정희 81%, 노무현 55%)와 60대 이상(박정희 84%, 노무현 40%)에선 정반대였다. 40대에선 노무현 77%, 박정희 63%로 노 전 대통령이 높지만 격차는 크지 않았다. 그해 12월의 18대 대선에서 박정희의 딸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건 이런 박빙의 호감도가 밑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4년 뒤인 2016년 조사에서도 이 추세는 그대로 유지된다. 박정희 68%, 노무현 67%로 거의 차이가 없다.

그러나 2020년 1월 조사에서 두 전직 대통령 호감도는 노무현 74%, 박정희 45%로 극적으로 변화했다. 20~30대뿐 아니라 40대(노무현 82%, 박정희 31%)와 50대(노무현 73%, 박정희 58%)에서도 노무현이 박정희를 압도했다. 직접적으론 박근혜 탄핵과 촛불의 영향이지만, 2012년 노무현에게 강한 호감을 보이던 20~30대가 나이 들면서 진보의 층이 두꺼워진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 한국리서치 정한울 연구위원은 “각 진영의 상징 인물에 대한 호감도는 투표 성향을 가늠해볼 수 있는 유의미한 지표다. 이 정도 격차로는 보수가 선거에서 승리하기란 매우 어렵다”고 말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호감도가 회복되면 달라지겠지만, 딸인 박근혜의 실패로 당분간 그 가능성은 높지 않다. 보수에서 새로운 상징 인물이 나타나기 전까지 지금의 정치지형이 바뀌기 쉽지 않은 이유다. 미국에서 루스벨트 영향력이 강하던 반세기(1930~70년대) 동안 민주당 다수파 시대가 지속되다 1980년 로널드 레이건이 새로운 보수의 상징으로 떠오르면서 비로소 정치 주도권이 교체된 것과 비슷하다.

여기엔 세대와 지역의 변화가 깔려 있다. 과거의 ‘지역 갈등’ 구도가 약화하면서 전국 차원의 ‘정치·사회 갈등’ 구도가 강해졌다. 지역과 세대의 변화는 현 시기 진보-보수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 중요한 나침반을 제공한다.

한국갤럽은 2012년과 2019년 유권자의 정치적 이념성향에 관한 의미 있는 조사를 했다. 스스로를 진보·중도·보수 중 어느 쪽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묻는 ‘주관적 이념성향 조사’였다. 이슈별 응답에 기초한 ‘객관적 이념성향 조사’와는 다르지만, 유권자의 투표 성향을 예상하는 데엔 유용한 도구다. 조사결과는 흥미롭다. 2012년 7만3105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나는 보수’라는 응답 비율이 ‘나는 진보’라는 응답 비율보다 높아지는 나이는 47살이었다. 47살 밑으로는 ‘진보’ 비율이 높고, 그 위 연령대에선 ‘보수’ 비율이 높다는 얘기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보수화한다는 통설이 있는데, 사회 전체적으로 ‘보수화’의 변곡점은 47살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2019년 조사에선 이 변곡점이 57살로, 7년 전에 비해 열살 정도 올라갔다. 2012년 한국 사회에선 47살이 ‘보수와 진보 숫자가 같은 나이’였다면, 지금은 57살이 그 나이라는 것이다. 57살 밑으로는 진보 다수의 세대가 형성됐다는 뜻이다. 이렇게 50대 후반까지 ‘진보’ 성향을 갖는다면, 보수정당은 매번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한다. 30년 전인 1990년대와 비교하면, 그때는 야당인 민주당이 항상 불리한 정치지형에서 싸웠다면 지금은 국민의힘이 같은 처지에 놓인 셈이다.

특히 ‘진보’ 성향이 도드라지는 연령대의 존재가 눈에 띈다. 2012년엔 20대와 40대에 비해 30대에서 고르게 진보 비율이 높게 나왔다. 2019년 조사에선 30대 후반~40대 중반의 진보 비율이 가장 높았다. 7년의 세월을 따라 진보세 강한 연령대가 그대로 옮겨간 것이다. 이는 최근 여론조사에서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을 떠받치는 연령대와 일치한다. 한국갤럽의 올해 10월20~22일 여론조사를 보면,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운영 평가로 ‘잘하고 있다’ 43%, ‘잘못하고 있다’ 45%였다. 한주 전에 비해 긍정 평가는 4%포인트 떨어지고 부정 평가는 3%포인트 올랐다. 그런데 30대와 40대에선 긍정 평가가 부정 평가를 여전히 큰 폭으로 앞서고 있다.(30대 51%-36%, 40대 56%-37%) 집권 후반기에도 문 대통령이 비교적 안정적인 지지율을 유지하는 동력이 바로 30~40대의 강력한 지원인 셈이다.

그 이유를 세대적 동질성에서 찾을 수 있다. 장덕현 한국갤럽 연구위원은 “지표로 보면 30대 후반~40대 초반이 가장 안정적인 진보 세대로 나온다. 2002년 노 대통령 당선과 2009년 그의 죽음을 겪었던 집단 경험, 그걸 바탕으로 2017년 탄핵 운동에 참여했던 것이 이 세대의 정치 성향에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젊은 시절, 특히 20대 초중반의 역사적 경험은 세대 전체에 큰 영향을 끼친다. 흔히 586세대라 불리는 지금의 50대가 과거의 50대에 비해 보수화하지 않은 건, 1980년 ‘광주 학살’의 경험이 이들의 삶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시민의 힘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노무현을 20살 무렵에 봤고 7년 뒤엔 그의 비극적 죽음을 목격했던 경험이 30~40대를 20대보다 확고한 진보 세대로 만든 것이다. 여기에 지금의 50대는 과거의 50대보다 진보적이다. 세대 분석으로만 보면, 한 세대 전인 1990년대에 비해 한국 사회는 분명히 ‘진보가 다수’인 사회로 이동했다. 최근 더불어민주당의 잇단 선거 승리엔 이런 인구사회학적 변화가 깔려 있다.



박찬수 ㅣ 선임논설위원. <한겨레신문>에서 정치부와 사회부·국제부 기자로 일했다. 국회와 청와대를 취재하며 ‘정치란 결국 권력 행사를 통해 사회를 바꾸는 것’이란 생각을 갖게 됐고, 그 점에서 어떻게 하면 권력을 제대로 올바르게 행사할 수 있을까에 관심이 많다. 청와대와 백악관의 작동 방식을 비교한 <청와대 vs 백악관>(2009년)과 1986년 태동한 민족해방(NL) 사조를 다룬 <엔엘(NL) 현대사>(2017년)를 펴냈다.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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