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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언택트'를 가능케하는 건...코로나 시대의 '투명 노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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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언택트'를 가능케하는 건...코로나 시대의 '투명 노동자들'

[기고] 서울 성동구의 '필수노동자 지원 대책'을 응원하며

실화를 배경으로 만든 <K-19 더 위도우메이커(과부 제조기)>라는 영화가 있다. 냉전 시기 소련은 최초의 핵잠수함을 개발하고 극비리에 훈련 중이었다. 그런데 이 잠수함이 나토 기지 근처에서 원자로 냉각기 고장으로 폭발 위험에 처한다. 누군가는 원자로 안으로 들어가 수리해야 하는 상황에서 7명의 승조원이 차례로 방사능 피폭을 무릅쓰고 이 일을 맡는다. 앞에서 엉망이 된 몰골로 나온 6명을 보고도 맨 마지막에 들어가 혼자서 18분을 버텼던 초급장교는 눈이 먼 상황에서도 수리를 끝마치고 처참한 상태로 끌려 나온다.

지난 봄, 코로나19라는 미증유의 감염병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선택을 하게 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재택근무를 하고, 마트와 시장에 가기를 중단하고, 학교에 가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저 잠수함 승조원들이 떠올랐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말에는 사실 어느 정도의 기만이 섞여 있다. 모든 사람이 대면접촉과 노동을 중단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집에서 안전하게 지내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더 많은 노동을 하거나 더 많은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정책적 결정을 내리거나, 사회의 여론을 주도하는 사람들, 재택근무가 가능한 직종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이들의 존재를 종종 망각한다.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코로나19 상황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원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뉴스에서 '언택트'나 '온택트'의 세상이 왔다고 할수록, 코로나로 인해 삶의 패턴이 바뀌었다고 할수록,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그 이전과 모든 것이 달라진다고 할수록, 보이지 않는 이들이 느꼈을 비감과 절망은 더욱 컸을 것이다.

방역은 어떻게 가능한가? 누군가가 방역을 하기 때문이다. 재택근무는 어떻게 가능한가? 누군가가 인터넷 통신망을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택트의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누군가가 먹고 마실 것을 집으로 배달해주기 때문이다. 치료는 어떻게 가능한가? 전문 의료인력과 그들을 돕는 다양한 분야의 의료돌봄노동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대중교통은 여전히 필요하며, 누군가는 먹을 것을 재배하고 옮기며, 누군가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출동해야 한다.

이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말 그대로 필수노동자다. 코로나19 시대에 반드시 필요한 필수노동자는 크게 3분야에 존재한다.

첫째는 당연히 방역과 치료를 담당하는 필수노동이다. 확진자가 다녀간 곳을 소독하고, 사람들이 지나는 곳을 쉴 새 없이 닦고 청소하는 이들의 노동은 중단될 수 없다. 감염병에 걸린 사람들을 치료하는 시스템은 멈출 수 없는 코로나19의 최전선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은경 본부장이나 가운을 입은 의사들처럼 보이는 사람들 이외에, 침대의 시트를 갈고, 환자복을 빨고, 쓰레기를 치우고, 식사를 나르는 수많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이 시스템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쟁 중에 장교들이 파업을 하듯이 일단의 의사들이 코로나19 상황에서도 환자들을 버려두고 갔지만, 이름 없는 병사들처럼 그 전선을 묵묵히 지킨 사람들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둘째는, 사회적 필수노동이다. 감염병 상황에서도, 전광훈과 같은 사람들을 통제하고, 태풍과 같은 재난에 대비할 수 있는 기본적인 공공서비스는 유지되어야 한다. 우리는 흔히 저 높은 곳에서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만 보지만, 실제로 현장에서 재난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먹는 것을 책임지는 배달은 이제 사회적 거리두기에서 생존에 필요한 필수노동이다. 배달 오토바이 사고가 급증하고 있다는 뉴스는 우리가 누구의 죽음을 대가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직시하게 한다. 이들은 이전에도 플랫폼 노동자로서 노동자성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노동자로서의 보호가 취약한 곳에서 노동시장의 경쟁도 무제한적이며, 코로나 상황에서 더욱 취약한 일터가 된다. 그들이 횡단보도의 신호를 무시하는 것은 배달노동자 모두가 그것을 지키면서 노동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는 시스템을 만들지 못한, 사회의 책임이다. 그들의 노동자성을 인정하지 않고, 더 빠른 배달은 바라는 세상은 이 필수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 몰고 있다.

돌봄노동은 사람을 직접 대면하지 않을 수 없는 노동이다. 일해야 하는 부모의 자녀들이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우리는 통계적으로 짐작할 뿐 눈으로 보지 못한다. 가계가 어려운 가정일수록 부모가 코로나19 상황에서도 일을 중단할 수 없을 가능성이 높고, 유치원과 학교에 가지 못하는 이 취약계층의 아이들이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할 가능성도 크다. 아동학대의 사각지대가 발생할 가능성도 당연히 높을 것이다. 우리의 사회적 거리두기는 이러한 비용과 희생을 치르면서 겨우 버텨가는 중이다.

저소득층 독거노인, 간병인의 도움이 필요한 환자와 노인들,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한 장애인, 이들 돌봄 체계의 전반을 현장에서 확인하는 사회복지 종사자들의 노동은 중단될 수도 없고 대체될 수도 없다. 게다가 코로나 감염에 더욱 취약할 수밖에 없는 돌봄 대상을 접하는 돌봄노동자들의 삶은 더욱 조심스럽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 경우에도 혹시나 감염의 매개가 되면 손가락질을 당하고 죄인 취급을 받게 된다. 돌봄노동에 대한 제대로 된 처우와 존중을 해 주지 않으면서, 더 많은 희생을 당연히 요구하고, 작은 잘못에도 엄중한 비난을 한다. 이것은 결코 정의롭지 않다.

셋째는, 말 그대로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위한 필수노동의 영역이다. 좋은 일자리가 최선의 복지라는 말은 틀리지 않지만, 좋은 일자리는 한정되어 있다. 그런 일자리에서 노동할 수 없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다. 국민소득은 3만 달러이지만, 2019년 1인가구의 중위소득은 최저임금과 같은 수준이다. 상위 10%가 전체 자산과 소득의 40% 이상을 차지한다. 결국 많은 취약계층과 차상위계층은 코로나 방역 상황에서도 일을 그만두기 어렵다.

소득과 자산이 실시간으로 파악되지 않는 우리 조세·복지 체계에서 이들의 삶에 대해 국가는 통계적으로 짐작하지만, 그게 누구인지 잘 알지 못한다. '노동이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노동을 중단할 수 없다'는 이 아이러니 속에서, 우리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한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이처럼 생계를 위한 필수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사회적 필수노동에 종사할 가능성이 더 높고, 동시에 단기 비정규직으로 고용보험 등 기존의 복지 사각지대에 놓였을 가능성도 더 높다는 사실이다.

코로나19는 그전에 없던 문제를 만들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우리 사회의 취약한 부분을 드러내고 있다. 감염병에 취약한 사람들은 그 이전에 다른 사회적 재난에도 가장 취약했다. 필수노동자들은 코로나 이전에도 필수노동자였다. 그런 사실의 일부가 겨우 드러나기 시작했을 뿐이다. 이론으로만 이야기하던 우리 사회의 불평등이 어떤 곳에서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작동해 왔는지 이제 겨우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방역과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작한 것은 벌써 몇 달이 지났지만, 필수노동자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대책은 제대로 논의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지난 1차 긴급재난지원금 때처럼, 현장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자치단체들이 먼저 그 상황을 민감하게 느끼고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기초자치단체가 맨 먼저 나섰다.

서울 성동구가 지난달 필수노동자 지원 조례를 제정했고, 이달 10일 공포를 앞두고 있다. 이미 필수노동자의 현황 파악과 예산마련도 상당부분 진척되어 있다고 한다.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다. 이제 광역자치단체와 국가도 나서야 한다. 당장의 지원책도 중요하지만, 코로나와 별개로 우리사회의 필수노동에 대해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비밀스럽고 불명예스러운 사고로 치부했기 때문에 잠수함 K-19의 희생자들은 '영웅' 칭호를 받지도 알려지지도 못했다. 훗날 그들의 묘비 앞에 모인 잠수함 승조원들 앞에서 함장은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스스로를 희생한 건 훈장 때문이 아냐. 단지 그 때 거기에 있었고, 그것이 그들의 의무였지. 해군을 위해서도, 조국을 위해서만도 아닌 바로 우리를 위해서였네."

필수노동자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그 무엇도 아닌 바로 우리를 위해 일하고 있다. 이제 그들에게 마땅한 대우와 존중을 논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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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후

16대, 17대 국회에서 보좌진으로 일하고, 영국 런던대학교(UCL)에서 '정치적 대표'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와 경남연구원에서 일하고, 행정안전부 장관정책보좌관, 국무총리 메시지비서관을 지냈다. 정치의 이론과 현실에 모두 관심이 있다.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로 있으며, <프레시안>을 비롯해 <경향신문>, <한겨레>, <피렌체의 식탁>에 칼럼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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