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약계층 실직에 감염 무방비…‘新카스트제’ 낳은 코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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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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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불평등 사회문제로 / 부자들은 접촉 줄이고 안전한 곳 피신 / 재택근무자는 위험 노출 적어 나은 편 / 일용직원은 생계 위해 감염위험 감수 / 휴교로 취약계층 학생들에 더 큰 타격 / 인터넷 보급 안돼 원격수업 못따라가 / 美 확진·사망 많은 건 비싼 의료비 때문 / 주류 백인의 피해보다 흑인이 2배 높아 / 공정·평등사회 구축 계기 될 수도 있어 / 보건분야에 대해 공공투자 정당성 강화 / ‘연대 특별세’ 등 불평등 해소 논의 활발

#1. 이탈리아 밀라노 교외에 사는 라라 풀치니티는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며 근근이 담보대출금과 자동차 할부금을 갚고 있었다. 지난 3월 본격화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는 그의 삶을 통째로 흔들어놓았다. 시간제 일자리가 사라지고 가계는 나락에 빠졌다. 그는 뉴욕타임스(NYT)에 “대출·할부금을 내는 대신 식료품을 사야 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감염되는 것보다 새 일자리를 구하기도 전에 휴교령이 해제될까 봐 두렵다. 아들의 학교 급식비를 낼 엄두가 나지 않아서다.

#2. 미국 뉴저지주 캠던의 10학년생 루이스 에체베리아에겐 원격수업 수단이 휴대전화 하나뿐이다. 푸에르토리코계인 그는 수업을 받고 과제를 제출하려면 몇 가지 장애물을 뛰어넘어야 한다. 인터넷은 연결이 잘 안 될 때가 많고, 전화기 화면은 너무 작다. 과제를 풀다 난관에 부딪혔을 때 영어를 잘 못하는 부모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에체베리아는 “나는 수업 도중 자주 손을 드는 학생이었다”며 “지금은 질문을 이메일로 해야 하는데, 보내기도 힘들고 제때 답을 들을 수도 없다”고 CNN방송에 호소했다. 그가 속한 학군의 빈곤율은 약 96%. 2019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캠던시 인구 42.4%가 흑인이고 50.3%는 라틴계다. 주변 다른 학생들 처지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얘기다.

미국 뉴욕 시민들이 13일(현지시간) 주방위군이 나눠주는 음식과 필수품을 받으려고 줄을 서 있다. 뉴욕=AFP연합뉴스
코로나19가 지난달 초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와 이란 고위 관료들에 이어 사우디아라비아 왕가에까지 침투하자 NYT는 “세계적 대유행이 지닌 평등주의의 증거”라고 했다. “적어도 그들이 검사나 치료를 받기 전까지는 바이러스가 부유한 왕자들이든 가난한 이주노동자든 차별 없이 괴롭힌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사태가 장기화하고 봉쇄령 같은 극약처방이 잇따르면서 코로나19는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 있다. 부자들은 타인과의 접촉을 최소화할 수 있는 한적한 휴양지나 호화 요트, 벙커 같은 곳으로 피신한다. 재택근무를 할 수 있는 이들도 감염, 실직, 급여삭감 우려가 작은 편이다. 반면 마트·식료품점 점원이나 배달원처럼 봉쇄사회의 일상을 돌아가게 해 주는 이들은 생계를 위해 감염 위험을 무릅쓰고 출근해야 한다. 실직, 무급휴직에 처하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코로나19 시대가 신(新)카스트 제도를 낳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프랑스 대서양 연안의 휴양지 누아르무티에섬에서 지난 3월 29일(현지시간) 테니스를 치며 휴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이곳에는 최근 코로나19를 피해 수도 파리에서 ‘별장 격리’하러 온 부호들이 많아 현지 주민의 눈총을 받고 있다. 뉴욕타임스 캡처
◆‘빈곤-건강 악화-감염 확산’의 악순환

코로나19 고위험군으로는 고령자와 기저질환자가 꼽힌다. 전문가들은 여기에 ‘열악한 사회경제적 상태’를 추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소득층은 이른 나이에 당뇨, 심장질환 같은 만성질환에 걸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몸이 아프더라도 병가를 내기 어렵거나 의료 혜택에서 소외되는 상황이 이를 부추긴다. 지난해 갤럽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26%가 돈이 없어서 질병 치료를 뒤로 미뤘다. 카이저패밀리재단(KFF) 조사에서는 응답자 51%가 치료 또는 처방약 조제를 받지 않거나 뒤로 미뤘다고 답했다. 모두 비용 때문이었다. 미국의 코로나19 확진자·사망자가 세계에서 가장 많아진 이유도 많게는 3500달러에 달하는 비싼 검사비가 원흉 중 하나로 꼽힌다.

이는 감염병 위기를 더욱 키우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P)에 따르면 식당 종업원들은 2013년 구토, 설사 등 증상이 있어도 5명 중 1명꼴로 출근을 했다. 결근했다가 해고될까 봐서다. 맨손으로 샌드위치나 과일 따위를 만진 이들 요리사와 웨이터는 노로바이러스 확산의 주요 매개가 됐다. 신종 인플루엔자(H1N1)가 유행했던 2009년과 2010년에도 비슷한 현상이 있었다. 미 여성정책연구원(IWPR)은 당시 증상이 있는 노동자 약 30%가 직장에 나가 일을 했고, 이는 전체 감염건수 27%의 원인이 됐다고 밝혔다. 니콜 에렛 미국 워싱턴대 교수는 “기존의 사회적 취약성은 감염병 이후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데, 코로나19가 전형적 사례”라며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1명이 모두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말했다.

◆흑인 사망 비율이 높은 까닭은
미국, 영국 등 백인이 주류인 국가에서는 흑인 피해가 특히 크다. 미 조사회사 APM리서치랩에 따르면 지난 11일 기준 코로나19로 인한 인구 10만명당 사망자는 흑인이 42.8명으로 백인(16.6명)보다 2.6배 많았다. 라틴계는 19.1명, 아시아계는 18.4명이었다.

영국 통계청(ONS)은 지난 7일(현지시간) 인구 구성비를 토대로 비교·분석한 결과 코로나19로 사망할 확률이 흑인 남성은 백인 남성의 4.2배, 흑인 여성은 백인 여성 대비 4.3배라고 밝혔다. 방글라데시·파키스탄계와 인도계 남성은 사망 가능성이 백인 남성보다 각각 3.6배, 2.4배 컸다. 연령과 건강, 빈곤, 가구구성 등 사회통계적 특성을 고려해 비율을 조정하더라도 흑인은 백인보다 2배 가까이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외신들은 의료 접근성, 주거 과밀도, 실업률, 일자리 성격 등의 차이가 이런 결과로 이어졌다고 분석한다. 예를 들어 2014∼2017년 영국 백인 가구는 2%만 과밀 거주를 경험했지만 흑인 가구는 12%, 방글라데시계는 30%가 이를 경험했다. 타인과 직접 대면하는 최전선 일자리 종사 비율도 소수인종이 훨씬 컸다. 싱가포르의 제2차 ‘감염 물결’도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하는 ‘기숙사 이주노동자’ 집단에서 촉발했다. 조지프 론트리 재단의 헬렌 바너드는 코로나19 시대의 인종적 양극화를 두고 “우리가 모두 같은 폭풍우를 헤쳐나가고 있지만, 모두가 같은 배를 타고 있지는 않다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했다.

◆불평등의 대물림

코로나19 확산으로 각급 학교가 문을 닫으면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미치는 충격파도 크다. 이번 사태로 빈곤의 대물림 구조가 더욱 강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미국 농무부에 따르면 2000만명 이상의 학생이 매일 끼니를 무상급식에 의존한다. 뉴욕시에만 약 75만명의 빈곤층 학생이 있으며, 이 가운데 11만4000명은 특정한 거주지 없이 보호소나 친척 집에서 등교하는 홈리스 학생이다. 빌 더블라지오 뉴욕시장은 지난 3월 휴교 결정을 주저하면서 “끼니를 학교에서 해결하는 학생이 너무 많다”는 이유를 들기도 했다. 뉴욕 교육당국은 학생들에게 세끼 포장음식을 제공할 수 있는 급식소 약 400곳을 만드는 대안을 내놨다.

취약계층 아이들은 원격수업을 따라가는 데에도 버거움을 느낀다. 노트북이나 태블릿PC는커녕 가정용 인터넷이 보급되지 않은 집에 사는 학생들도 많다. 미국통신산업협회에 따르면 2017년 기준으로 700만명의 학령인구가 집에서 인터넷을 이용하지 못한다. 텍사스주의 한 학군은 원격수업 진행을 위해 와이파이 장비를 설치한 스쿨버스 110대를 곳곳에 보냈을 정도다. 뉴저지주의 한 사립학교 교사는 코로나19 사태로 공립·사립학교 학생들 간 격차가 더 벌어지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번 위기에서 우리가 뭘 할 수 있는지, 무얼 해야 하는지 돌아봐야 한다.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공정·평등한 사회 계기 삼아야”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불평등 문제 해소를 위한 담론이 활발하게 제기되고 있다. ‘21세기 자본’의 저자 토마 피케티 파리경제대 교수는 12일 영국 일간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1918년 스페인 독감 당시 미국과 유럽에서 인구의 0.5∼1%가 사망했지만 인도에서는 6%가 숨졌다”며 “우리 역시 그런 불평등의 폭력에 맞서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위기가 더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 구축의 기회가 될 수 있다”면서 “적어도 보건 분야에 대한 공공투자의 정당성을 강화했다”고 덧붙였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최근 각국의 경제보호기금 조성 방안으로 소득·부동산·부에 대한 세금을 인상하는 ‘연대특별세’를 제안한 가운데 부유세 논쟁에도 불이 붙었다. 대니얼 마코비츠 예일대 법대 교수는 “대유행병에 맞선 우리의 전투는 가장 큰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이 수십 년 간 풍요의 시기에 쌓은 어마어마한 자산에 의존해야 한다”며 “미국의 상위 5% 가정에 5%의 세금을 부과하면 2조달러를 확보할 수 있다”고 말했다. 피케티 교수 역시 2차대전 직후 독일과 일본이 일시적인 부유층 과세를 통해 1950년대 중반 이후 공공부채 없이 재건에 착수할 수 있었던 사례를 언급하며 “필요가 당신을 창의적으로 만든다”고 강조했다.

유태영 기자 anarchy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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