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역사상 재난은 항상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재난의 범위나 강도가 점차 심각해짐에 따라, 재난이 하나의 학문 분야로 등장할 정도입니다. 다시 말해, 세계가 재난사회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난은 인류의 문제일 뿐 아니라 기독교인의 문제입니다. 특히 성경에는 재난의 중요한 한 형태로 질병이 나옵니다. 그 예로 <<출애굽기>>의 "10가지 재앙", <<요한계시록>>의 "진노의 일곱 대접"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요즘 말로 "질병"인데, 현재 초미의 관심거리인 "코로나19" 전염병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교회는 재난에 대해서 어떤 응답을 해야 할까요? 간단히 말해, 교회는 재난에 있어서 기독교의 3가지 덕이라고 하는 믿음, 사랑, 소망을 재확인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최근 한국교회는 "코로나19" 사태와 관련하여, 예배 지속 혹은 일시 중단의 문제로 인해 큰 갈등과 홍역을 앓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주로 믿음의 차원에 속한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이것은 큰일이고, 신앙적이면서도 현실적인 해결책이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눈을 들어 사랑과 소망의 차원도 살펴봐야 합니다. 교회사를 보면, 교회는 재난을 당할 때, 희생적인 사랑을 보임으로써 그 진정성을 인정받았습니다. 그런 희생적인 사랑은 소망에서 나왔고, 또한 소망을 지금 여기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교회와 재난의 관계에 있어서, 교회는 외적으로는 재난을 극복하기 위한 사랑의 실천에 앞장서야 하고, 내적으로는 재난을 대처하는 "재난 대처 공동체" 혹은 "위기관리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첫째, 사랑의 실천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기독교는 세상으로부터 크게 두 가지 면에서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나는 기독교가 진정한 신앙공동체가 될 때였습니다. 사도행전 11장에 나오듯이, 기독교가 인종의 경계를 넘어서서 진정한 신앙과 신앙생활의 모습을 보이는 공동체가 될 때, 주위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즉 기독교는 선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은 기독교인 스스로가 붙인 것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이 기독교인의 아름다운 믿음을 보고 붙여준 별명입니다.
다른 하나는 기독교가 희생적 사상을 실천하는 사랑공동체가 될 때였습니다. 기독교는 교회사를 관통하면서 지속적으로 희생정신을 보여주었고, 그때마다 주위 사람들은 감명을 받아 기독교를 인정했습니다. 이런 사실은 교회사가, 선교역사가, 심지어 종교사회학자까지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가령 로드니 스타크는 <<기독교의 발흥>>에서 이런 희생정신을 기독교 성장의 주요인으로 손꼽은 바 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당시 기독교인들은 위에서 언급한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만큼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또 다른 별명을 얻게 되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곧 "던지는 자"(무릅쓰는 자)라는 것인데, 기독교인들이 전염병이 퍼진 가운데 희생적인 자원봉사를 하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그들을 "자기 목숨을 던지는 자"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Wendy J. Gade, Pandemic Flu Plan for the Church: Ministering to the Community in a Time of Crisis (Bloomington, IN: WestBow Press, 2016).]
교회는 교인에게 사랑의 실천을 강요할 수 없지만, 이것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격려해야 합니다.
둘째, 재난의 대처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인류역사상 대표적인 전염병 재난이었던 "스페인 독감"의 경우를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먼저 이 "스페인 독감"은 교회의 예배를 크게 변화시켰습니다. 미국의 경우, 학교는 물론 교회도 폐쇄했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경우, "코로나19"가 언제까지 어느 정도나 지속될 지 전망하기 어렵습니다. 아직은 "코로나19" 상황이 "스페인 독감" 정도로 확산되지 않아 그나마 예배 지속이냐 일시 중단이냐 하는 논란이 벌어지고 있지만, 만일 이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된다면 결국 교회는 사회 전반에 걸친 조치로 인하여 교회의 의사와 상관없이 폐쇄될 전망이 높습니다. 이미 중국에서는 교회를 포함한 집회를 금지하고 있고, 몽골의 경우는 5인 이상의 집회를 금지하여 학교와 교회는 물론이고 결혼식과 명절까지 금지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준 미국교회의 경우도 엄청난 재난 앞에서 주일성수의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스페인 독감"이 바꿔놓은 것은 예배 출석만이 아니었습니다. 기독교의 성례 중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인 성찬례의 양상까지 바꾸었습니다. 기독교는 성찬례에서 하나의 잔을 공동으로 사용했는데, 19세기 말부터 점차 의학적 지식이 증가하면서 개인 잔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스페인 독감"으로 인하여, "개인 잔" 사용이 결정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그 결과 성찬례를 할 때 하나의 잔을 공동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생기는 위생상의 염려를 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지요. 따라서 성찬례의 형식도 만고불변이 아니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당연시되는 "개인 잔" 사용은 불과 1세기 남짓한 관례인 셈입니다.
교회는 역사상 다양한 재난의 도전에 응전했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교회는 재난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를 돌아보면서 교회사에 나타난 교회와 재난 특히 한국교회와 재난의 관계를 살핌으로써, 교훈도 얻고 좋은 구상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가 갈수록 재난사회의 특징을 강하게 나타나는 마당에, 교회가 현재를 직면하고 미래를 대비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재난 대처 공동체"로 전환하는 일을 미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생각하고 준비하고 감당할 일이 많습니다. 어쩌면 교회와 재난의 관계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지도 모릅니다.
한국의 근현대사는 격동의 역사입니다. 따라서 한국의 근현대사에 등장한 기독교의 역사 역시 격동의 역사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기독교의 역사는 재난의 도전과 이에 대한 교회의 응전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첫째, 자연재해입니다. 1889년 큰 기근이 벌어졌고, 개신교와 가톨릭교회가 공동으로 구호사업을 벌인 바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한국에서는 과거에 일반적으로 개신교와 가톨릭교회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이런 맥락을 생각해볼 때 이 공동 구호사업은 거의 예외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신교와 가톨릭교회의 관계가 개선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의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계기로 가톨릭교회가 타교파 및 타종교에 개방적이고 우호적인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던 때부터였습니다. 이밖에 교단총회 보고서를 보면, 한국과 한국교회가 가난한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해외의 재난을 위해 헌금 등 도움을 주기로 결정한 사례들이 적지 않습니다.
둘째, 19세기 말 전후하여 전염병이 거듭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에서 선교를 개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의료선교사들이 놀라운 의술과 더불어 희생정신을 발휘했습니다. 오늘날 선교사 묘역으로 유명한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이 생겨난 것도, 미북장로교선교사 헤론(John W. Heron, 1856-1890)이 장거리 지방 왕진을 갔다가 전염병에 걸려 갑자기 서거함으로써, 그의 매장이 문제가 되어 급거 묘원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로부터 4년 뒤 미감리교선교사 홀(William James Hall, 1860-1894)은 청일전쟁 당시 치료에 헌신하다가 전염병에 감염되어 서울로 급히 호송되어 치료받던 중 서거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비극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내인 홀 여사(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는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인 여의사 양성, 한국인 여의학교 설립을 위해 헌신했고, 그의 아들인 홀(Sherwood Hall, 1893-?) 역시 2세대 선교사로 한국으로 돌아와 결핵퇴치에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이후에도 선교지에서 사람들을 고치려다가 희생된 의료선교사들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습니다.
셋째, 전쟁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사실 한국의 근현대사는 한반도를 둘러싼 전쟁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1939년 제2차 세계대전), 1950년 한국전쟁 등 거의 10년 단위로 전쟁이 이어졌습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그친 지 아직 1세기가 되지 못했습니다. 전쟁은 인류 최대의 비극이고 갈수록 전면전의 성격을 띰에 따라 군인과 민간인의 구분마저 힘든 처참한 사건입니다. 더구나 이런 과정에 놓인 한국은 식민지화, 분단, 동족 간 전쟁 등으로 내부 상황마저 악화일로에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기독교인들은 재난에 수동적으로 굴복하지만 않고, 믿음, 소망, 사랑의 계기로 삼았습니다. 일일이 사례를 열거할 수 없어, 대표적인 것만 들기로 하겠습니다.
19세기 말에 벌어진 청일전쟁은 한반도에서 벌어진 신식무기를 동원한 최초의 대규모 전쟁이었고, 평양이 중심적인 격전지였습니다. 당시 평양에서 사역하던 선교사들이 전쟁 가운데서도 용감하게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미북장로교선교사 마펫(표준 외국어 표기로는 모펫, Samuel Austin Moffett, 1864-1935)은 교인 보호를 위하여 평양을 지키다가 부득이 서울로 일시 올라왔지만, 상황이 정리되자마자 평양으로 급히 돌아갔습니다. 한편 위에서 언급한 홀 선교사와 동역했던 한국기독교인 김창식은 홀로 평양에 남아 미감리회소속 시약소 건물에 십자가를 내걸고 지켰고, 서울로 올라간 선교사들에게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후 홀과 마펫이 상황이 허락하자마자 '임시 여행허가증'을 받고 곧바로 평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덕주, <<스크랜턴: 어머니와 아들의 조선 선교 이야기>> (서울: 공옥, 2014), 338-339.]
홀은 이렇게 돌아간 평양에서 치료에 힘쓰다가 결국 서거했던 것입니다.
20세기 중반의 대표적인 전쟁인 한국전쟁은 여러 가지 면에서 언급할 것이 많지만, 특히 전선이 한반도의 거의 전역을 여러 차례 휩쓸었던 탓에, 특히 민간인의 희생이 컸던 전쟁이었습니다. 전쟁 수행이나 전쟁 중 구호 및 전후 복구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 유엔이었고, 그중에서도 미국이 중심이었습니다. 이밖에도 수많은 민간 구호 단체가 참여했고, 심지어 한국전쟁을 통해 새로 생긴 단체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이런 구호 및 복구에 있어서 국내외적인 통로가 된 것이 바로 한국교회였습니다. 한국교회는 20세기 전반까지는 소규모 종교집단이었지만 사회적 영향력이 컸고, 교회 분야는 자립했지만 기독교 기관은 서구교회의 지도하에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수많은 교회지도자 및 사회지도자를 배출했습니다. 한국교회와 이런 지도자들이 한국의 사회와 교회가 전화의 폐해로부터 다시 일어서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사실 한국교회가 한국전쟁 이전에는 자립정책에 의해서 내부적으로는 교회 재정의 자립을 추구했지만 외부적으로는 사회 구호에 소홀한 면이 있었는데, 한국전쟁을 통해서 내부적으로는 교회 재정의 의존 특히 해외 의존이 강해진 대신 외부적으로는 민간 구호의 주요 통로가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교회를 통한 구호의 혜택을 입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넷째, 나라사랑으로 인한 고난입니다. 삼일독립운동 당시, 한국교회는 정신적 지도자였을 뿐 아니라 실질적인 대표적 피해집단이었습니다. 당시 교세에 비해서, 한국기독교인은 피해자의 다수를 차지했습니다. 교회는 핍박받고, 노회, 총회 등이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했으며, 총회장도 선교사 시대에서 한국기독교인 시대로 넘어온 지 이미 수 년이 되었지만 문제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선교사를 다시 선출했습니다. 이렇듯 온갖 고초를 당했지만, 한국교회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캐나다 출신 미북장로교선교사였던 게일(James Scarth Gale, 1863-1937)은 삼일독립운동으로 인하여 기독교인들이 서대문형무소를 가득 채웠을 때 기도와 찬양을 이어가는 모습을 보고, 그곳이야말로 위대한 부흥의 장소였다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감옥을 교회요 성경학교로 바꾼 것은 한국교회의 유구한 전통입니다. 청년 이승만이 입헌군주제 문제로 투옥되었을 때도 그랬고, 신사참배 당시도 그랬으며, 한국전쟁 당시 포로수용소에서도 그랬습니다.
다섯째, 산업화와 민주화로 대표되는 국가건설의 문제였습니다. 한국교회는 산업화에도 기여했을 뿐 아니라, 산업화의 이면에 노출된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한 민주화에도 기여했습니다. 이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입니다. 한국교회는 온갖 재난에도 불구하고, 이에 굴복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발전해왔습니다. 비록 최근에는 교회 성장 둔화 내지 쇠퇴의 문제가 거론되고, 교회가 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개혁의 대상이라거나 교회가 세상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염려한다는 말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가 한국교회에 거는 기대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더 이상 소수집단이 아닙니다. 따라서 책임 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마지막, 사회적 갈등입니다. 21세기의 최대 사건들로 손꼽을 수 있는 것이 "세월호 사건"과 "코로나19"입니다. 특히 "코로나19"는 최근의 여타 전염병과 달리 "세계적 전염병"(pandemic)으로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두 사건 모두 기독교에서 이단시하는 종파들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바로 "구원파"와 "신천지"입니다. 이 종파들과 기독교의 관계, 이 종파들에 대한 기독교의 책임 등에 대해서는 이 자리에서 다루지 않겠습니다. 다만 현재 초미의 관심인 "코로나19"에 대해서는 적어도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교회 성장 이데올로기에 매몰되고 도시화 등의 이동 현상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면서, 포기한 것이 바로 "이명증서"라는 소중한 유산입니다. 이로 인하여 교인 관리, 교단 통제 등 행정적인 측면은 물론이고 치리라는 영적인 측면도 해결 불가능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만일 한국교회가 이명증서라는 전통을 지켜 나왔다면, 다른 집단은 몰라도 적어도 신천지는 오늘날처럼 기승을 부리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 한국에서 신천지 문제로 인하여 한국교회도 비난에서 무관하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또한 이런 비난을 벗어나는 데는, 이단성 여부나 신앙 헌신도 여부 같은 교회 내적 논란이 아니라 교회의 사회 기여도 같은 교회 외적인 논란이 중요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최근 위기에 봉착해서, 특히 예배 문제로 염려하고 있습니다. 사실 주일성수가 중요하고 또한 해야 하지만, 너무 단기적인 관점에서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교회는 초대교회 이래로 신앙적 박해 가운데 순교자도 배출했지만, 대다수는 은둔하는 가운데 신앙을 유지했습니다. 로마제국의 경우, 3세기에 걸친 박해 속에서도 신앙의 불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일본도 3세기에 걸친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이어간 집단이 있었고, 일본 개국 후 이들이 지상에 나타남으로써 재일선교사들을 경악하게 만든 일이 있습니다. 한국 가톨릭교회도 2세기에 걸친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서 세계가 놀랄 만큼 부흥한 신생교회가 되었습니다. 지금 북한에서 신앙의 자유가 제한되지만, 아직 1세기도 되지 않았기에 어디선가 신앙의 끈을 놓치지 않고 이어나가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이런 모든 상황을 긴 안목에서 볼 일입니다.
앞서서도 말했듯이, 세계는 급속도로 재난사회로 돌입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세계화로 인하여, 모든 전염병(epidemic)은 세계적 전염병(pandemic)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스페인 독감"이 세계적으로 번진 것도 주된 원인은 제1차 세계대전을 마치고 각국으로 귀국한 병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국가 간 이동은 일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웬디 게이드(Wendy J. Gade)는 응급의학을 전공한 기독교인으로 세계적 전염병이 지속되는 상황을 보면서, 교회가 재난 대처 공동체가 되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즉 그는 <<교회를 위한 세계적 전염병 독감 계획: 위기의 시기에 공동체를 섬기기>>(Pandemic Flu Plan for the Church: Ministering to the Community in a Time of Crisis)에서, 교회가 재난 대처에 앞장설 뿐 아니라, 나아가 재난 대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제 재난은 신학적 문제일 뿐 아니라 목회적 문제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재난을 직면하면서, 교회 자체와 교회의 이웃 사회를 재난으로부터 보호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위기관리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재난 대처 공동체가 되려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교회는 지금이라도 이 길을 성큼성큼 걸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장로회신학대학교 안교성 교수